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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 Mar 30. 2016

차곡차곡 시간의 빚을 쌓고서.

이사할 때 새 책장을 사지 않았다.

5년 전 리사이클숍에서 1000원 주고 산 네 칸짜리 책장이 전부.


전에 살던 집에서는 맘씨 좋은 주인 할아버지가 제법 큰 책장을 놓아줬더랬다.

내 물건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안 봐도 집안 구석구석을 더럽혀놓을 게 뻔했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발장, 침대, 냉장고, 옷장, 가스레인지, 에어컨까지 필요한 것은 다 있었는데, 굳이 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을 덥석 해주는 수도 서울의 인심이라니.

이것이 빌라 한 채를 가진 강남 할아버지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인가.


암튼.  


덕분에 사는 동안 편했다. 그 많은 책, 종이 더미를 널찍한 책장에 차곡차곡 쌓아 깔끔하게 가둬두고 나면

움직이는 족족 발에 채일 번거로움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이사 후 잠시 골치가 아팠다. 그 널찍한 책장을 몰래 떼어 올 수도 없고, 그만한 책장이 들어갈 공간도 마땅치 않은데 대체 이 책들은 다 어쩌지.


다 읽었거나 버려도 아깝지 않은 책들은 이미 상당한 양을 알라딘에 바친 후였다. -강남에도 있고 종로에도 있는 그 알라딘 말이다-


그런데도 책은 여전히 많았고 남은 것들은 갈 곳이 없었다. -아니다. 책이 많다기보다는 집이 좁은 탓이다-


책장을 하나 사서 정리를 하자니 더 지저분해질 것만 같아, 그냥 소파 옆에 하나 둘 쌓기로 했다. 그럴싸한 인테리어처럼 보일 것 같기도 하고.


한국과 일본에서 영화를 볼 때마다 틈틈이 수집한 영화 포스터 모음집 몇 권과 좋아하는 잡지들을 빼내 뒤편에 차곡차곡 쌓았다. 두툼하고 큼직해서인지 뒷줄은 금세 찼다. 앞줄은 두꺼운 교양서를 바닥에 먼저 깔고 그 위에 소설, 산문, 영화비평, 만화책, 시집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올렸다.


가, 나, 다 순 혹은 장르별. 그런 류의 매뉴얼 따위는 없었다. 큼직하고 작은 것들을 눈으로 어림잡아 되는대로 쌓았을 뿐. 색인을 따지려거든 교보문고에 가야지, 내 집에선 내 손이 가는 대로.




다 쌓고 보니, 묘한 기분이었다.  

이것들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 시간도 장소도 공간도 모두 뒤죽박죽 된 과거를 보는 느낌이었다.


어떤 책은 더위를 피하러 들어간 책 중고매장에서 단돈 천 원에 산 것이고, 어떤 잡지는 한국에서 구하기 힘들어 일본에 갔을 때 어렵게 손에 넣은 것이다. 삼만 원이 훌쩍 넘는 남자 팔뚝만 한 두께의 책들은 보자마자 흥분하며 샀다가 아직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고, 소설과 인문학의 중간중간 치즈처럼 껴 있는 박노해와 류시화, 함민복, 박준, 윤동주, 릴케, 헤르만 헤세는 요즘 한창 빠져있는 나의 별미들이었다.


유학 당시 발표 논문을 위해 두 배의 배송비를 물어가며 한국으로부터 공수한 근현대사 책들과 사보에 들어갈 신간을 정리하다 마음이 홀려 덥석 산 로맨스 소설들. '멀티 플레이어'가 되겠노라 다짐하며 호기롭게 받아온 디자인 활용서.


읽은 것, 읽다 만 것, 읽어야 할 것들이 뒤섞여 있고 제각각 이곳에 온 이유도 다르다.       

모양도 다르고 문자도 다르다.


어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의 세계가 이렇게 펼쳐져 있구나. 나의 시간이 이렇게 여기저기 다른 모습으로 쌓여 있구나.


문득 생각해보니 난 이것들을 손에 집어 들고 집으로 향할 때까지만 설렜다. 하룻밤 자고 나면 쉽게 무관심해졌고 권태로워졌다. 심지어 책장을 가지고 있는 동안엔 이 소중한 사연들을 까마득히 잊었다.  


갑자기 책들을 보기가 미안해졌다. 너희는 인테리어용이 아닌데.

설렜던 그 시간에 어마어마한 빚을 진 느낌이다.




그 빚들이 이렇게 쌓여 있다. 소파 옆에.


이제는 하루에 한 번 이자를 지불해야지.

계속 쳐다보고, 뒤적거리며 내가 밑바닥에 놓아둔 빚은 무엇인지 재차 확인하면서.


그때의 사연은 어떠했나, 제목마다 새겨진 추억을 쓰다듬는 것도 쏠쏠한 취미가 될 것이다.



다행이다. 이 집이 좁아서. 책장을 사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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