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던졌고 고민했다.
내가 충고를 하고 있다.
까만 문자가 빼곡히 박힌 종이 위에 볼펜을 요리조리 굴려가며,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다.
후배는 얼굴이 붉어졌다, 파래졌다, 하얘졌다.
당황한 듯 보였는데 그것도 잠시, 꽤 성이 난 얼굴로 퉁퉁거리기 시작했다.
그럴싸한 변명과 방어. 그 후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요즘 것들이란." 순간 나도 모르게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나, 상사가 된 건가.
누군가에게 충고를 해본 적이 없었다. '각자도생' '마이페이스' '인생독고다이' 따위의 말들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더랬다. 후배가 어떤 일을 하든 간섭하기 싫어했더랬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귀찮았다. 대놓고 솔직하자면 책임지기 싫었다.
내 앞의 문제는 내 것. 그러니 그것은 당연히 나의 책임.
나를 모두 던져서라도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다.
하지만 후배의 문제는 다르다. 내 문제도 아니고 책임져야 할 의무도 없다. 네 잘못은 네 잘못. 네가 잘하건 못하건 모든 것은 다 너의 역량이고 너의 그릇.
나는 그랬다. 모른 척하고 싶었다. 나만 잘하면 될 일이지.
그런 내가 충고를 하다니.
누군가를 이끌어 줄만큼 나의 아량은 넓지 못하다. 그런데 충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기획회의라는 명목으로 후배를 커피숍에 데려다 앉혀 놓고는 그 후배의 소심함과 답답함을 지적하고, 능동적이지 못한 일처리를 비판하고, 교정 좀 잘 보라며 타이르기를 반복했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결국, 충고란 상대방의 허점을 끄집어내고 나의 우월함을 과시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 우월함이란 것도 사실 실체가 없다. 일을 하다 허덕이는 때는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충고를 하는 입장이라고 해서 완전무결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부족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이끌기 위해 던져야 하는 충고는 때때로 모순적이다. 나는 이제 그 모순을 견뎌야 하는 상사가 된 것이다.
당황해 얼굴이 벌게진, 화난 입을 쭉 빼 내밀며 변명거리를 찾는 후배 앞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아야 하는 상사. 어이쿠, 나야말로 당황스러워 얼굴이 벌게지는 감투다.
같이 일하는 후배를 답답하다 여기며, 일처리에 짜증이 나 어찌할 줄 몰라하며. 늦은 밤 나의 단잠을 방해하는 것은 이제 못된 상사가 아니라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후배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나는 오늘도 충고를 던진다.
이게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그런 '꼰대'는 되지 말자는 신념만 간신히 붙들고 있다.
일 못하는 후배에게 나는 오늘도 제발 일을 잘하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렇게 상사가 되어간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