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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 Apr 29. 2016

생활의 욕망 그리고 

출근길엔 늘 시원한 아이스바닐라라떼가 마시고 싶다.

열여덟살 봄처녀처럼 마음이 들뜨는 이맘때엔 더욱. 

현실에 묻힌 몸은 마음 같지 않아, 더 마시고 싶다.


전쟁터로 향하는 무거운 걸음에 긍정의 날개를 달아줄

짙은 농도의 당분이 '필히' 필요하다.


거의 매일 아침, 나는 아이스바닐라라떼를 마시며 출근한다.

자, 보자. 집 근처 커피숍에서 50% 테이크아웃 할인을 받아도 3천250원.

이걸 20일 기준으로 치면 한 달에 커피값으로 6만 5천 원을 쓰는 셈이 된다.


점심때 후식으로 마시는 아메리카노와 나른한 휴일 커피숍에서 유유자적 허세를 부리며 마시는 

카푸치노까지 포함하면 음료에 쓰는 비용은 아마 십만 원도 훌쩍 넘을 것이다.


여기에 때가 되면 사 입어야 하는 옷들. 옷 욕심이 꽤 많은 나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지출이다.

나름 합리적인 소비를 한다고 자부하며 옷을 사지만 결국 브랜드 티셔츠 한 장을 살 돈으로 

보세숍 티셔츠 3~4장을 사니 결과적으로 드는 비용은 비슷하다.


일명 '품위유지비'라는 명목으로 쓰는 이 돈은 어림잡아도 한 달에 30만 원 정도. 


사람들 만나면서 후줄근하게 보이기는 싫고, 커피 한 잔도 대접 못하는 찌질이도 되기 싫어서 쓰는 돈들이다. 근사한 여행지에서 휴일을 보내지는 못해도 집 앞 커피숍에서 그럴싸한 '#커피스타그램' 사진을 찍으며 작은 허세라도 부리려 쓰는 돈들이다.


때 되면 엄마, 아빠 용돈도 드려야 하고, 우리 예쁜 조카의 옷도 철마다 새 것으로 사주고 싶다.

친구들 결혼이며 돌잔치, 장례식까지. 각종 경조사에 몇 십만 원 쓰는 건 이제 일도 아니다. 


지적 허영심이 있어 책 사는 일도 빼먹을 수 없다. 서점에 갈 때마다 쓰는 돈이 평균 5만 원.


나이 먹을수록, 연봉은 조금씩 오른다. 

그런데 '나이에 걸맞은 돈'을 써야 하는 순간은 나이만큼 많이, 더 자주 찾아온다. 




월급날 25일. 

카드 결제일 25일. 

기부금 자동이체 25일

휴대폰 요금 22일

월세 3일

각종 공과금 대략 15일~20일


세상에나, 책임져야 할 돈이 이렇게나 많다. 

한 입 베어 물면 텅 빈 속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갈빵처럼

돈은 그렇게 잠깐, 아주 잠깐 동안 내 배를 불려놓고 한 입에 펑 사라진다.


꼭 필요한 지출과 내 일말의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지출.

이 책임과 욕망이 기다리는 25일.    


생활의 작은 욕망들을 돈으로 채우고, 이내 비워지면 나는 다시 돈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돌아간다.

돈이 다시 내 욕망을 해결해 줄 때까지, 내 책임을 연대해줄 때까지 민들레 홀씨보다 더한 인내심을 가지고 한 달을 버텨내는 것이다.


그리고, 반복이다. 

아껴야지, 아껴야지 하면서도 '내가 왜?'라는 반항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돈의 속성이 그렇다.

절약 혹은 저축 따위의 성실한 흐름보다 더 강렬하게 사람을 끄는 것은, 돈의 물리감이 주는 작은 일탈 같은 것이므로. 


월급날 괜히 치킨이 시켜먹고 싶겠는가. 괜히 단골 인터넷 쇼핑몰의 장바구니에 들어가 보고 싶겠는가. 


맛있게 한 입 먹고 나면 이내 허무해지는 공갈빵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아, 나는 돈을 쓰고 싶다. 이미 쓰고 있지만 더 강렬하게 쓰고 싶다.


맛있는 아이스바닐라라떼를 한 잔이라도 더 사 마시려면, 그 작은 허영심에 나의 타성과 번민을 던지려면

열심히 벌어야 한다. 그렇게 번 돈을 돈답게 욕망하고 돈답게 쓰면 될 일이다. 




퇴근길에 택시를 탔다. 언제나처럼 지하철을 타면 되었지만, 왠지 사람들의 땀냄새와 굳은 표정 속에 묻히기 싫은 날이었다. 1천250원 대신 1만 4천 원을 지불하고 나는 약간의 편안함과 위안을 얻었다.



오늘도 나는 생활의 욕망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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