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프닝과 개똥철학
한 달 전, 엄마로부터 '소개팅 한 번 해보지 않겠냐'는 전화를 받았다. 외삼촌이 다리를 놓아준 것이었다. 그런데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그걸, 갑자기 하라고? 거기다 제주도에 있는 나에게? 영 내키지 않았다. 소개팅에 '시읏'자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던 옛날처럼 마냥 싫었던 건 아니었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마주 앉아 '너와 내가 잘 맞는다면 연애든 결혼이든 ok', 이런 암묵적인 계산과 동의 아래 '갑작스럽게' 오고 가는 대화와 눈빛은 상상만으로도 나를 여전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어렸을 때도 없었던 융통성이 나이 들었다고 나아지겠느냐 말이다. 대충 얼버무리며 날 내버려두라고 할 밖에.
엄마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다 외숙모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이 3주 전이다. "너만 날짜를 빨리 정해주면 돼" 하셨다.
친척에게까지 전화가 왔으니, 이건 뭔가 일이 단단히 벌어지고 있구나, 직감했다. 단호하게 거절할 수 없어 '다음 달에 시간을 내 보겠노라' 긍정의 여지를 남겼다. 뭔가 떠밀리듯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일종의 체념 같은 게 생겨버린 걸까.
확실히 변화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 스스로 소개팅을 바라보는 자세와 태도, 가치관이 변했다기보다는 '이제 이런 방식이 아니면 영영 혼자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과 체념이 훌쩍 커버린 때문이었다.
한창 불던 비바람이 걷히고 요 얼마간은 날씨가 굉장히 좋아 덩달아 설레기도 했다. 단순히 날씨 때문만은 아니려니, 싶었다. 나도 누군가를 만나게는 되는구나, 이렇게 시작되는 건가, 뭐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화창한 날씨에 고만 감화가 되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쿵 설레발을 치기도 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물색없이.
그런데 며칠 전,
소개팅 날짜까지 잡아 놓고 명함을 찍어서 보내 달라는 외삼촌의 이상한-내 가치 판단으로는 분명히 이상한- 요구까지 들어주며 그렇게 두려움과 체념을 받아들였는데...
"남자에게 연락해보니 조금 있으면 결혼을 한다네."
이건 무슨 소리일까. 그럼 상대방의 상황도 확인해보지 않고 나에게 남자를 들이밀었단 말인가.
소개팅 복마저 지지리도 없구나. 외삼촌도 외숙모도 엄마도 나도 민망한 순간이었다.
상대방도 모르게,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상황이 참 우습고 황당했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누군가를 기다렸던 나의 마음이 더 우습고 안쓰러웠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기꺼이 끌려가려 했던 나의 이면과 소개팅 후 생활의 변화 같은 것들을 그려보며 고민하고 간간히 설레어 한 나의 흑심.
실체가 없는 소개팅에 마음껏 휘둘린 꼴이 된 것이다.
아아,
남들 다 하는 소개팅 그 한 번을 나는 참 하기가 어렵구나..., 그렇게 싫어했던 소개팅을 이제 내가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구나...,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앞에서 어느샌가 나도 유연해지고 있구나...,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있구나....
소개팅 해프닝 덕에 참 별별 개똥철학을 곱씹게 된 나였다.
그냥 웃어야지 뭐.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