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제주 사이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남쪽 섬 제주에도 늦은 한파가 닥쳐 요 며칠 꽤 추웠다. 하루 종일 벼락같은 비가 내릴 때도 있었고, 한밤중엔 벽을 뚫어버릴 기세로 맹렬하게 달려드는 강풍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작년 3월에도 이런 비바람은 흔했던 듯하다. 아마 중순이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뜨거운 봄이 오겠지만. 여하튼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 덕에, 지난 1년 무료할 틈은 없었구나.
드문드문 무심하게 쓰인 내 일기장이 말해주듯, 이곳에 널어놓은 이야기들이 실로 별게 없듯 나는 1년 반이라는 시간을 그런대로 유유자적하며 별다른 사건 없이 잘 보냈다.
게을러서 놓친 것도 많고 생각이 많아 포기한 것도 셀 수 없지만, 그래도 ‘제주행’이라는 큰 결단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깡만큼은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런대로 만족 또 만족.
2016년 겨울, 무작정 제주에 내려와 버린 일.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생의 엄청난 사건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그러니, 그동안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았어도 내 나름대로는 ‘허 참, 별 거 없이 이렇게 잘 살아냈구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서울로 돌아갈 때가 되니, 처음 제주에 오기 전 내가 처했던 상황들을 되짚어보게 된다. 그땐 사람이 무서웠고 싫었고 귀찮았지, 하면서.
일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고 사람 쓴 맛도 보면서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싶던 때였다. 장소를 옮기면 새로운 기회와 경험이 나를 회복시켜줄 거라고 믿던 그때.
먹을 만큼 먹은 나이에도 사회생활이란 건 여전히 참 어려운 거더라. 그게 제주에선 괜찮았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역시 ‘아니오’다. 그래서 알았다. 나는 서울이 싫어진 게 아니라, 다만 잠시 숨을 고르고 익숙한 것들이 다시 보고파질 때까지 시간을 벌고 싶었을 뿐이라는 걸.
생각해보니, 정말 그것뿐이다.
(제주에서도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건 별반 달라질 게 없었다. 여전히 나는 나였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내 마음은 늘 이 풍경을 향해 있었던가. 정작 어디에 있고 싶었던 것일까.
맑게 펼쳐진 풍광을 따라 무작정 걷고 싶었을까.
아니면, 끊임없이 유혹하는 제주의 바다에 한 번쯤은 풍덩 젖고 싶었을까.
이 섬을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노래로 남겨놓고 싶었을까.
아니면, 저 일몰 너머에 있을 다른 그림을 상상하고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 두 발과 마음이 결코 완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서툴렀고 불안했으며, 그래서 헤맸고 시시때때로 흔들렸다. 하지만 언제나 끝은 오기 마련이다. 이렇게 조심스레 되돌아보는 일은 어쩌면 별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그저 앞으로만, 정직하게 흐르므로.
나는 또 어딘가에 놓여, 어떻게든 잘 살아가고 있겠지. 이제는 제주를 떠나야겠다는 확신이 생기는 걸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