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는 벌금의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라 곳곳에서 벌금 표지판을 볼 수 있어요. 싱가포르는 엄벌주의 법 집행으로 유명합니다. 길거리에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리면 100만 원,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면 50만 원, 지정되지 않은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면 1-200만 원 벌금을 내야 합니다.
껌을 금지하는 것은 이미 유명합니다. 껌을 금지하게 된 이유는 지하철 때문이에요. 1987년, 싱가포르에 지하철이 생겼습니다. 지하철이 개통되고 불과 몇 년 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지하철 문이 닫히지 않아 출발을 못하는 일이 잦아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기술적인 결함이나 운행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했대요. 그러나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어요. 지하철 자동문 센서에 누군가 껌을 붙여서 지하철이 매번 멈춰 선 것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역무원들은 어디 문에 껌이 붙어있는지 찾아야 했습니다. 껌 때문에 시스템 전체가 망가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싱가포르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내립니다. 1992년에 껌 생산, 제조, 판매를 모두 금지했어요. 껌을 몰래 반입하거나 판매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혹은 1억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합니다.
싱가포르는 독립을 한 이후에 생존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합니다. 그중 하나가 법 인식 개선이었어요. 다민족 국가이다 보니 당시만 해도 국민들 간의 공통된 법 인식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정부는 강한 규범을 시행해 질서를 확립하려고 합니다.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 리콴유는 정부는 국민을 교육하고 올바른 생활 습관을 권고할 의무가 있고, 질서와 시스템을 해치는 고집 센 소수를 처벌할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원칙은 국가적 희생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지켜집니다. 싱가포르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서는 그 누구든 싱가포르 국내법에 따라 처벌을 받으며, 정부는 어떤 순간에도 타협하지 않습니다.
1993년에 마이클 페이라는 미국 청년이 싱가포르에 와서 큰 장난을 칩니다. 20여 대의 민간 차량에 페인트 스프레이를 뿌리고 교통 표지판 등 공공 기물을 훼손한 것입니다. 마이클은 경찰에 체포되었고, 싱가포르 법원은 태형 6대, 징역 4개월, 벌금 3,500 싱가포르 달러를 선고합니다. 이 처벌을 둘러싸고 미국과 싱가포르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있었고,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까지 나서서 그의 사면을 요구했어요. 그러나 싱가포르는 굴하지 않고 형을 집행했습니다.
2002년에도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베트남계 호주인 응우옌 뜨엉 반이 마약을 반입하다가 체포된 것입니다. 그는 캄보디아에서 마약을 반입해 호주로 가는 중이었고,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다가 적발되었습니다. 3년 간 재판이 진행되었고, 2005년에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호주 총리가 당시 싱가포르 총리에게 다섯 번이나 전화를 걸어 구명을 요청했다고 해요. 그러나 싱가포르는 대법원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합니다.
싱가포르의 대법원은 현재 내셔널 갤러리가 있는 장소에 있었습니다. 왼쪽에 돔이 있는 건물이 대법원 건물이었고, 오른쪽 건물은 원래 시청으로 사용되었어요. 2015년, 이 두 건물을 이어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예술 전시 공간이 탄생합니다.
건물 안에는 유치장을 보존해 두었어요. 재판이 열리기 전에 죄수들이 대기하는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10개의 남자 유치장과 2개의 여자 유치장이 있었대요.
구 대법원에는 4개의 법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1개의 대법원장 법정과 항소 법정입니다. 대법원은 최고법원이기 때문에 보통 상고 사건이나 재항고 사건을 다루고, 살인 등 중범죄들을 다룹니다.
재판이 열리면 죄수들은 아래 사진의 계단을 이용해서 법정으로 들어갔다고 해요.
법정으로 올라오면 죄수가 앉던 자리로 이어집니다. 원래는 긴 벤치가 있었고, 벤치 아래쪽에는 금속 바가 있었대요. 금속 바에 수갑을 채워두었다고 합니다.
죄수가 앉던 자리 맞은편에는 판사가 앉던 자리가 있습니다. 서기는 판사 바로 앞에 자리했고, 판사의 오른쪽에는 증인, 왼쪽에는 배심원 자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앞쪽에는 검사와 변호사가 자리했다고 해요.
구 대법원 빌딩에서 이뤄졌던 두 가지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싱가포르의 법 시스템을 바꾼 중요한 재판이에요.
첫 번째 재판은 2차 세계 대전 도중에 이루어집니다.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한 이후, 네덜란드의 한 중사가 1943년에 전쟁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전쟁 포로로 잡혀있던 중에 여섯째 아이를 출산합니다. 남편이 없이 신생아를 포함한 여섯 아이를 돌보아야 했던 아내는 절박했고, 셋째 아이를 말레이계 친구 아미나에게 입양 보내는 결정을 합니다. 아이의 이름은 마리아였고, 다섯 살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부부는 다시 만났고 딸을 다시 찾아오려고 합니다. 수소문 끝에 1950년에 당국은 말레이시아에 살고 있는 아이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하는지 결정하는 재판을 하기 위해 아미나와 마리아를 싱가포르로 불렀습니다. 마리아는 13살이 되었고, 말레이어를 구사하며 무슬림으로 자랐습니다. 마리아는 생물학적 부모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첫 재판에서 생물학적 부모에게 돌아가라는 판결이 내려집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말레이 커뮤니티가 반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는 항소를 합니다. 항소는 대법원에서 진행되었고 천명이 넘는 말레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재판은 단 5분 만에 끝났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은 판결을 바꾸지 않고 확정 판결 선언을 했습니다.
이 선언을 듣고 말레이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차와 빌딩을 불태우기 시작했고, 유러피안 경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폭동은 2주 간 지속되었습니다. 18명이 사망하고 176명이 부상을 당하는 심각한 폭동이었어요. 결국 폭동을 일으킨 사람 중 4명이 살인으로 대법원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이 4명의 변호를 누가 맡았을까요?
영국에서 갓 돌아온 젊은 변호사, 리콴유였습니다. 리콴유는 매우 뛰어난 변호사였습니다. 이 4명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고, 이 점을 파고들어 배심원들을 설득했습니다. 배심원들은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리콴유의 수기에 따르면, 사실 그는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을 맡게 되었고, 변호사로서의 책임을 다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리콴유는 판사였다면 설득하기 훨씬 어려웠을 것이고, 아마 다른 판결을 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배심원 제도가 싱가포르를 위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는 변호사의 카리스마와 날카로운 변론이 정의를 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총리가 된 리콴유는 1969년에 9명의 대법관 위원회를 꾸려 배심원 제도를 재고합니다. 8명의 대법관이 배심원 제도를 없애는 것에 동의했고, 현재 싱가포르에는 더 이상 배심원이 없습니다.
다시 마리아의 이야기로 돌아가볼게요. 마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리아는 폭동이 벌어지는 동안 네덜란드로 보내졌대요.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리아는 결국 네덜란드에 잘 정착했다고 합니다. 이후 네덜란드인 남편과 결혼을 했고 10명의 아이를 낳고 잘 살았대요.
두 번째 재판입니다. 1981년, 토 파요의 한 공공 주택 계단에서 9세 여아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경찰은 사건 현장 주변 250여 명을 상대로 집중 조사를 벌였으나 단서를 잡지 못했습니다. 2주 후 10세 남아의 시신이 또 발견됩니다. 이번에는 소년의 몸에서 아파트까지 이어지는 혈흔이 발견되었고, 범인이 체포됩니다. 살인을 주도한 것은 자칭 영매술사이자 영혼 치료사인 애드리안 림 (Adrian Lim)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저지른 성폭행 혐의 때문에 이미 수사를 받고 있었고, 경찰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2명의 다른 여성과 함께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습니다. 그들이 임명한 변호인단은 피고인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며 감경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이에 반대하며 사형을 주장합니다. 판사들은 검찰의 주장에 동의해 세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애드리안은 형벌을 받아들이고 항소권을 포기했지만, 여성들은 선고에 불복해 항소했습니다. 대법원에서 다시 한번 재판이 열렸고, 같은 판결이 내려집니다. 이들은 또 항소합니다. 싱가포르 최고 기관에서 선고를 내렸는데 어디에 항소를 했을까요? 영국 추밀원 (Privy Council)입니다. 당시만 해도 영국 국왕의 자문 기관인 추밀원에 항소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추밀원도 확정 판결을 내립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싱가포르 대통령에게 사면을 호소합니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형에 처해집니다.
이 재판 이후, 영국 추밀원에 항소를 하는 절차를 없앱니다. 현재는 대법원 결정에 항소는 싱가포르 대통령에게만 요청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대법원은 내셔널 갤러리 바로 뒤편에 있습니다. UFO 접시 모양을 한 건물이 현재 대법원 건물이고, 현재 대법원 창문에 예전 대법원이 비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동안 <인사이드 싱가포르>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싱가포르, 그리고 싱가포리안들과 가까워지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했기를 바라요.
싱가포르 외에 세계 골목길을 다니며 만난 아름다운 공간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골목길 세계여행> 링크로 놀러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