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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per Apr 07. 2024

미대생과 벽화 구경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팔레르모 소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트렌디한 지역이다. 세련된 레스토랑, 펍, 길거리 상점들이 많지만, 오늘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미대에 다니는 비토와 스트리트 아트 구경을 하러 왔다.


나는 스트리트 아트를 좋아한다. 예술을 일상으로 들여오고, 골목을 자유로운 표현의 장으로 만들고, 새로운 생각과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위 그림의 벽 전체는 팔레르모에 사는 한 아티스트가 그렸다고 한다. 아티스트의 이름은 나세팝, 원래 이름은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10대 때 네덜란드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다채로운 암스테르담과 대비가 극심했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보고 그는 따분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반항심에 그는 집 근처에 있는 온갖 벽에 자기 이름을 적기 시작한다. 문제는, 본인의 본명을 적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경찰은 다니엘을 금방 찾을 수 있었고 그의 집에 찾아왔다. 다니엘의 엄마는 화가 났지만, 다니엘을 혼내는 대신에 그라피티에 대한 책을 건넸다. 다니엘은 이내 그라피티에 푹 빠지게 된다. 그렇게 다니엘은 유명한 스트리트 아티스트가 되었고, 세계 곳곳에 입체적인 3D 스타일과 임팩트 있는 글자 스타일이 특징인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아르헨티나 골목을 걷다 보면, No me baño라는 글자를 자주 마주친다. “나는 씻지 않아요”라는 뜻이라고 한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자기 고백을 하는 것일까. 이 이야기는 탄딜이라는 지역의 그라피티 아티스트와 스케이터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함께 모여 노는 친구들이었는데, 새로운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독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더러움의 문화였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주로 생활하며 실제로 잘 씻지 않았고, 그게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No me baño라는 글자를 여기저기 적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그 낙서가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금세 밈 (meme)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이 문구를 적는 것에 동참했고, 그 트렌드가 4년 동안이나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위 벽화는 Rockingmojo의 작품이다. 그는 게으름을 표현하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고, 모조를 만들었다. 팔레르모의 사람들은 모조의 매력에 빠졌다. 편하게 누워 게으르게 빈둥대는 모조. 모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조의 복제품들을 골목에 그리기 시작했다. Rockingmojo는 모조의 복제품들이 골목에 스며들고, 본인의 예술이 퍼져나가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Rockingmojo가 이 자리에 그림을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Rojasleon이라는 칠레 아티스트가 모조 근처에 글자를 입히기 시작했다. 처음에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화가 났다고 한다. 모조의 작품을 훼손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Rockingmojo는 오히려 모조의 방을 꾸며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이 자리로 돌아와 바닥에 노란 담요를 추가로 그렸다. 모조가 더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모조의 관용과 포용이 돋보이는 따뜻한 작품이다.



비토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벽화도 소개해줬다. Uasen94가 그린 “I am watching you”라는 제목의 벽화다. 최면에 걸릴 것 같은 배경과 옷 패턴, 그리고 어린 소녀의 눈. 비토는 이것을 보면 미디어의 영향이 떠오른다고 했다.



“미디어는 최면 같아요. 우리는 소셜미디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미디어는 우리가 보는 것, 입는 것, 행동하는 모습을 바꾸잖아요. 이 작가가 그걸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벽화를 볼 때마다 그렇게 해석해요.”



산타 로사 골목에 있는 이 집은 1887년에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부자였던 가족이 살던 집이다. 사람들은 이 집을 팔레르모의 핑크 하우스란 부른다. 마지막으로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은 나탈리아 오레이로라는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여배우라고 한다. 그녀가 여기에서 살 때 건물 밖에 모자이크 양식을 추가했다.



왼쪽 기둥에 있는 배트맨은 아들이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이고, 오른쪽 기둥에 있는 그림은 집에서 공주라고 불렀던 딸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녀의 가족 사랑이 잘 드러나는 장식이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이 벽은, 여러 겹의 이야기가 담긴 벽이다. 자세히 보면 모자이크 질감이 보이는데, 원래는 모자이크로 된 벽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한 꼬마가 스프레이캔을 들고 이 골목에 나타났다. 그리고 모자이크 벽 위에 그라피티를 남긴다. 시 당국은 해결책에 대해 고민을 한다. 그라피티를 지울까, 그라피티로 채울까, 아니면 다른 그림으로 덮을까.


하지만, 결론은 벽 전체 회색으로 칠하는 것이었다. 팔레르모의 주민들은 화가 났다. 모자이크를 완전히 망쳐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따분한 회색벽은 스트리트 아티스트에게 새 캔버스가 되었다. 사람들이 와서 벽화를 그리고, 그라피티를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면 시 당국이 또 출동해서 회색으로 덮었다. 이 과정이 2-3개월에 한 번씩 무려 4-5년 동안이나 반복되었다고 한다. 이 사이클을 멈추고 싶었던 당국은 결국 얼마 전에 벽화 아티스트에게 허가를 내주고,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현재 작품은 Pride Month를 기념하여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자이크도 보이고 회색칠도 보인다. 도색이 지워지면서 회색벽 아래에 덮여있던 이전 벽화의 일부도 보인다. 이 여러 겹의 벽을 바라보며, 스트리트 아트의 특별함에 대해 생각했다. 스트리트 아트가 다른 예술과 다른 점은 금방 사라진다는 점이다. 한동안 골목을 장식하던 벽화는 새로운 벽화로 덮이고, 새 벽화는 새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잠깐 폈다가 사라지는 벚꽃처럼 우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유한하기에 더 소중하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언젠가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돌아보면, 이 골목은 새로운 작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주변을 감싸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벽화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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