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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per Apr 07. 2024

탱고의 발상지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라 보카 (La Boca)는 항구를 품고 있다. 1880년대부터 아르헨티나의 항구로 이민자들이 몰려왔다. 1870년, 200만 명이 채 되지 않던 아르헨티나 인구는 1914년 790만 명이 된다. 많은 이민자들과 항구 노동자들은 라보카에 모여 살았다. 이곳은 오랫동안 가난하고 혼잡한 지역이었다. 



그들은 힘든 삶과 감정을 춤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춤은 감정 표현의 수단이자,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이었다.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리듬과 동작, 문화가 혼합되어 탱고가 탄생했다. 아보카의 까미니또 (Caminito) 거리에 가면 길거리나 레스토랑에서 탱고 공연을 볼 수 있다. 감정적이고 우아한 동작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라 보카 하면 ‘라 보카의 화가’ 베니토 킨켈라 마르틴(Benito Quinquela Martín)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라 보카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다. 활기찬 항구의 풍경, 그리고 선박과 선원들의 모습을 보며 자랐고, 이는 그에게 큰 영감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석탄을 이용했고, 이후에는 항구에 있는 배에서 페인트를 얻어 시멘트와 섞은 후 질감 표현을 했다. 그는 주로 라 보카의 항구와 선원들에 대한 그림을 그렸고, 금방 유명세를 얻고 부자가 되었다. 



부자가 된 그는 라 보카의 주민들과 지역 사회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등학교를 만들고, 아이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아래 사진의 왼쪽 건물 1층이 초등학교다. 그 위 2층에는 박물관을 올렸다. 젊은 아티스트에게 투자를 했고, 그중에 몇 명은 훗날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박물관에서 킨켈라와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3층에는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종종 유명한 예술가나 정치인들을 집으로 불렀고, 그중 몇몇은 아이들에게 직접 수업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른쪽 건물은 극장이다. 



극장 옆에는 유아원이 있다. 아래 사진에서 하늘색과 빨간색이 섞인 건물이다. 1940년대에는 사람들이 기부한 모유로 고아들을 키웠고, 이후에는 우유를 제조하여 아이들에게 영양을 공급했다고 한다. 현재에도 7살까지 아이들이게 필요한 모든 백신을 제공한다. 그 옆에 회색 건물은 어린이 치과이고, 가장 오른쪽 베이지색 건물은 고등학교다. 킨켈라는 예술, 교육, 헬스케어 전반에 거쳐 라 보카를 혁신했다. 



킨켈라는 1940년대와 50년대에 슬럼화된 라 보카를 아름답게 만드는 데에도 일조했다. 로컬 아티스트들과 주민들이 함께 골목을 알록달록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항구에 정박한 배에서 기부한 남은 페인트로 집을 칠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러 색상이 섞인 건물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까미니또에서 보카 주니어스 스태디움으로 가는 길, 굉장히 인상적인 벽화를 만났다. 아르헨티나에는 흰 스카프를 모티브로 한 벽화를 많이 볼 수 있다. 아픈 역사 때문이다. 1970년대 말, 아르헨티나도 독재를 겪었다. 독재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납치를 당하고 실종되었다. 이 벽화에는 라 보카에서 실종된 사람들의 이름들이 있다. 약 3,500명이 실종되었는데, 그중에 약 80%가 25세 이하의 어린 청년들이었다. 아이들을 기다리던 엄마들이 거리로 나섰다. 



천 기저귀를 쓰던 시절, 아르헨티나의 엄마들은 아이의 첫 번째 천 기저귀를 보관했다. 그 기저귀를 다시 꺼내 머리에 두르고 대통령 관저 근처를 돌기 시작했다. 당시에 항의나 데모는 물론이고, 2-3명이 모이는 것도 불법이어서 다른 방법을 찾은 것이다. 1978년에 아르헨티나는 월드컵을 개최했다. 전 세계의 저널리스트가 아르헨티나에 방문했고, 그중에 네덜란드 기자는 월드컵 개막전 대신 엄마들을 인터뷰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아이들을 찾겠다는 일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모였다. 마침내 1985년에 재판이 열렸고, 결국 독재자를 감옥에 보내고 새로운 시대를 맞을 수 있었다. 강인한 어머니들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이 어머니들은 아직도 매주 목요일 오후 3시에 대통령 관저 근처를 돈다. 




라 보카에는 유명한 축구 클럽 보카 주니어스의 홈구장이 있다. 보카 주니어스는 1905년 라 보카 지역에 사는 5명의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의해 설립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라 보카에서 창단된 리버 플레이트와 숙명의 라이벌이다.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는 라 보카 내의 스타디움 주인 자리를 두고 축구 경기를 한 적이 있다. 라보카에 두 개의 스타디움을 놓기에는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고, 가까운 지역에서 더 큰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그들은 운명의 축구 경기를 한다. 결과는 보카 주니어스의 승. 리버플레이트는 뉴녜스로 홈구장을 옮겼다. 



보카 주니어스의 상징색은 파란색과 노란색이다. 사실 이전에는 흑백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었는데, 비슷한 옷을 가진 팀이 있어서 고민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해결했을까? 역시 축구 경기를 했다. 예상할 수 있듯이 보카 주니어스의 패. 그들은 어떤 색깔을 골라야 할지 몰라 운에 맡기기로 했다. 라 보카의 항구로 갔고, 첫 배의 첫 깃발 색상을 클럽 색으로 하기로 한다. 첫 번째 배는 스웨덴 화물선이었고, 스웨덴 국기의 파란색과 노란색을 클럽 색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보카 주니어스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사랑받는 축구 클럽 중 하나이고, 주요 대회에서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하며 성장하고 있다. 국제 타이틀 수는 AC 밀란과 함께 세계 최다고,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의 클럽 세계 랭킹에서 6번이나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탱고와 예술, 벽화와 축구. 라보카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가 깃든 곳이다. 아름다운 삶과 역사가 춤추고 그려지는 이곳이 참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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