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쿡은 호주에 도착한 첫 영국인이다. 그는 영국의 탐험가이자, 항해사이자, 지도 제작자였다. 군 말단에서 시작하여 빠르게 항해장으로 승진했고, 입대한 지 단 2년 만에 국왕이 승선하는 함선을 조종하게 되었다. 그는 태평양을 7번 항해했고, 하와이 제도를 발견했으며 뉴질랜드의 해도를 제작한 인재였다. 제임스 쿡은 1770년 호주 동해안의 보타니 베이 (Botany Bay)에 도착했다. 현재 시드니 국제공항이 있는 지역이다. 제임스는 영국으로 돌아가 이곳을 영국의 식민지 후보지로 제안한다.
영국에는 당시 죄수가 많았다. 일부 죄수를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 당시의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미국 독립전쟁 (1775-1783년)이 벌어지며 이것이 어려워졌다. 따라서 제임스 쿡이 발견한 호주를 유배 식민지로 삼기로 한다.
1786년, 아서 필립이 호주로 가는 배의 함장이자, 호주의 유배 식민지인 뉴사우스웨일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신대륙 호주로 항해할 선원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서 필립은 농업과 건설, 수공업 경험이 있는 인물이 선원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기각되었다. 결국 그는 778명의 죄수들과 해병대 부대, 식민지 관리자들을 11척의 선박에 태우고 1787년 항해를 시작했다.
약 8개월 후, 첫 배가 보타니 베이에 도착했다. 아서 필립이 눈으로 본 보타니 베이는 제임스 쿡이 설명한 것과 달리 크게 희망이 없어 보였다. 땅은 경작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깨끗한 물이 없었다. 아서 필립은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그는 작은 배를 타고 항해를 하기 시작했고,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이동하여 시드니 항구에 도착한다. 탐사 끝에 그는 깨끗한 물을 발견하고, 해병대와 죄수들을 시드니 항구로 데려온다. 아래 사진의 청록색 빌딩 뒤, 빨간색 간판의 메리어트 호텔 쪽이 수자원이 발견된 곳이라고 한다.
제1함대에는 토마스 바렛 (Thomas Barrett)이 타고 있었다. 그는 잘 알려진 도둑이자, 위조 범죄자였다. 그는 처음에 물건을 훔친 것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토마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죄목에 비해 선고가 가혹하다고 생각했던지, 영국은 형을 종신형으로 감형하고 그를 미국으로 보내기로 한다. 미국에서 노예로 남은 생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런데 항해가 시작되고 며칠 후, 토마스 바렛과 죄수들이 반란을 일으켜 배를 장악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는 대신에, 아일랜드로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악천후로 그들은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영국에서 도망쳤다가 붙잡혔다. 몇몇의 죄수들은 바로 사형을 당했으나, 토마스 바렛은 사형 집행이 유예되었다. 반란 중에 선장과 청지기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이 사유였다. 그는 결국 감형되었고, 이번에는 호주로 보내진다. 호주로 가는 첫 죄수 그룹에 포함된 것이다.
호주로 가는 길에 함대가 리우데자네리우에 잠시 정박했다. 토마스 바렛은 벨트 버클, 단추, 숟가락 등으로 위조 동전을 만들어 현지 뱃사공으로부터 음식을 사다가 적발되었다고 한다. 선박의 수석 외과의사인 존 화이트의 말에 따르면, 제작 기술은 매우 좋았고 다만 금속의 품질이 좋지 않아 위조가 적발되었다고 한다. 마침내 함대는 호주에 도착했고, 존 화이트 의사는 토마스 바렛에게 은색 접시로 도착 기념 메달을 만들라고 요청한다. 이 작품이 호주 식민지 예술의 첫 번째 작품이다.
호주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채 안되어, 토마스 배렛은 또다시 범죄를 저지른다. 상점에서 식량을 훔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아서 필립 주지사는 도둑질을 하면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를 했었고, 그는 결국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는 두 번 사형을 피했지만, 세 번째 선고는 피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식민지에서 처형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린웨이 레인은 프란시스 그린웨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골목 이름이다.
그린웨이는 건축가였다. 그는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건축 비즈니스를 하다가 파산을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그는 문서를 위조했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4년 형으로 감형되었고, 시드니에서 복역하게 된다. 그는 죄수의 신분으로 맥쿼리 등대의 설계와 건설을 담당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그는 석방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공공기관의 엔지니어 역할을 맡아 초기 호주에 필요한 중요한 건물들을 건설했다. Hyde Park Barracks, 첫 정부 건물, 세인트 제임스 교회 등이 그의 작품이다.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더 록스에는 그린웨이 레인이 만들어졌고, 28년 간 호주 10달러 지폐의 주인공이 된다.
현재 그린웨이는 호주 지폐에서 사라졌지만, 아직도 20달러 지폐에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는 Mary Haydock도 록스의 죄수였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메리는 할머니 손에 자라다가 군대에 보내졌다. 군대 생활이 힘들었는지 도망을 쳤고, 그러다 말을 훔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녀의 나이는 고작 13세였다. 체포 당시 그녀는 남자로 변장하고 훔친 말을 거래하려고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7년형을 선고받았고, 호주로 보내진다. 이후 그녀는 Thomas Reibey라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토마스는 화물 사업을 했고, 사업이 크게 번창했다. 남편이 사망하자, 메리는 일곱 자녀를 돌보며 토마스의 사업을 넘겨 맡아 운영하게 된다. 남편이 출장을 떠날 때마다 메리가 직접 일을 총괄했기 때문에 업무에 익숙했고, 그녀는 수완이 좋았다. 사업은 점점 확대되었고 그녀는 식민지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 되었다. 이후, 그녀의 집에 호주의 첫 번째 은행인 뉴사우스웨일스 은행이 설립되었다. 그녀는 진취적이고 결단력이 강한 성격으로, 성공적인 비즈니스 우먼이자 자선사업가, 교육자로 명성을 얻었다. 호주는 이를 기리기 위해 1994년부터 그녀를 20달러 지폐의 모델로 활용하고 있다.
캐드먼의 작은 집 (Cadman's Cottage)는 더 록스 지역의 해안선에 건설된 최초의 건물이자, 시드니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주거용 건물이다. 토지 매립 전 원래는 해안선에 있었던 건물로, 만조 때에는 물이 집 바로 앞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존 캐드먼은 1798년에 영국에서 온 죄수였다. 그는 말을 훔쳤고,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지역으로 감형을 받고 호주로 이송되었다. 그는 조선소에서 일을 했다. 20여 년 일을 한 이후에 그는 사면되었고, 사면 이후에도 계속 조선소에서 일을 하며 조선소를 관장하는 소장으로까지 올라갔다. 정부의 모든 배를 관리했고, 그 일을 할 때 이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캐드먼은 이 집에서 가장 먼저 거주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 집에서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이곳을 캐드먼의 작은 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는 록스에 있던 Elizabeth Mortimer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그녀도 역시 영국에서 왔고, 헤어 브러시와 칼을 훔친 죄목으로 7년형을 선고받았다. 선고를 받을 당시 그녀는 5살, 3살 난 두 딸이 있었고, 두 딸과 함께 호주로 보내졌다. 그녀는 신발 장인인 토마스 로빈스의 집에서 일했고, 당시 존 캐드먼은 토마스 로빈스의 고객이었다. 존 캐드먼에게 신발을 가져다주다가 두 사람이 만났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둘은 정부의 허가를 받고 결혼을 했고, 사면을 받았다. 존 캐드먼은 총독에게 편지를 써서 시설에 보내졌던 두 의붓딸을 되찾았고, 모두가 함께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록스가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잭 먼디(Jack Mundey)의 공이 컸다. 1970년대 초반, 시드니의 도시 계획은 더 록스를 마천루로 가득 찬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잭 먼디는 주택과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운동에 뛰어들었고, 재개발에 반대했다. 그는 시위를 이끌었고, 더 록스의 철거 현장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건물 지붕 위로 올라가 경찰에 대응하다가 체포된다. 더 록스를 구하는 데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며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공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