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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Apr 11. 2021

그놈의 자기소개서

20대의 솔직한 자기소개서라고 하고 싶다



요즘 들어 자기소개서라면 취직할 때야 쓸 줄 알았던 어린 날의 내가 참으로 부러워진다. 취직은 어떻게 노력하면 되는 줄 알았지, 취업난이 내 얘기는 아닐 줄 알았지, 다들 어디에서든 일하고 있었으니까. 입학하자마자 자기소개서를 썼다. 학회에도, 동아리에도 자기소개서-지원서-와 면접이 필수였다. 대외활동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12월에는 대기업 대외활동의 면접을 보았다. 이제야 말하지만 그렇게까지 간절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간절하게 면접을 준비했다. 1분 자기소개를 외우고, 회사 연혁을 찾아보고, 유튜브 영상들을 보고, 블로그를 보고, 또 보고, 이전 기수의 활동 후기를 읽고. 하고 싶은 말까지 미리 연습해뒀다. 난 열두 시간 동안 면접 준비를 했는데 정작 면접에 가니 나에게 관심 없는 이가 없었다. 날 쳐다보지도 않고 질문도 하지 않고 어필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날 뽑을 생각이 애초에 없었구나. 그럼 통과시키지나 말지. 비참했다. 나중에 다시 돌이켜보니 내가 바보 같았다. 어차피 떨어질 거면 할 말은 할 걸. 하고 싶은 말은 하고 나올 걸. 솔직하게 이야기할걸. 어차피 재수할 줄 알았다면 현역 때 오엠알에 하트 모양이나 그릴 걸, 하는 것과 같은 후회였지만.




기업은 간사하다. 젊음은 아름답지 않다. 젊다는 이유로, 지위가 없고 경험이 없고, 너 대신할 애들은 널렸다는 이유로 우리는 착취당한다. 자기들은 월급을 받고 일하는 거면서 우리에게는 '경험 쌓기'를 강조하며 열정 페이를 요구한다. 대외활동, 서포터즈라는 이름 아래에서 대학생들은 혹사당한다. 정당한 대우를 해주는 기업도 있지만 그건 소수일 뿐. 대학생도 알고 있다. 그들은 그저 정당한 대가를 치르기 싫기 때문에 그런 이름 아래 우리를 노예 마냥 부려먹는다는 거.



서포터즈는 각박하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지원서를 쓰고, 합격하면 2차 영상 / 카드 뉴스를 제작하고, 합격하면 3차로 면접을 본다. 웬만한 입사 시험의 번거로움과 다를 게 없다. 중간에 떨어지는 학생들에게 보상이 없는 게 대다수이다. 우리가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은 흩어져 사라질 뿐이다. 요새 노력하지 않는 애들은 없다. 취업난은 본인 문제라고 하는 사람을 보면 프라이팬으로 머리라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자기소개서를 써보고자 한다. 나에 대한 설명서가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은 것.



자기소개 

날이 맑네요. 저는 4월의 6시를 좋아해요. 봄기운은 살짝 가시고 여름이 느껴지네요. 꽃이 필 때는 설렘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제가 남은 계절에도 행복한 건 초록빛을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글 쓰는 걸 좋아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가 일상적인 단어밖에 쓰지  못한다는 걸 알았어요. 누가 그러더군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비유는 필요 없다고. 지루할 뿐이래요. 그래서 고민했어요. 자전거를 타러 가는 길에 햇살을 받는 잎들을 보면서요. 차갑다는 표현은 어떤가요? 잎을 만지면 몸속 곳곳에 차가움이 돌고 돌 것 같아요. 바람은 시원한 지금이 제가 가장 사랑하게 될 올해인 것 같아요. 자전거를 타면 청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어요. 어디까지나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속으로 생각해요. 최근에는 테니스가 정말 재밌어요. 우울할 때도 있었지만 항상 즐거웠어요. 못한다고 혼나지 않았고 노력은 칭찬받아요. 포핸드는 이제 괜찮은데 백핸드가 안 되는 게 고민이에요. 앞으로 수업이 두 번밖에 남지 않았다니 믿을 수 없어요. 테니스 때문에라도 이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글을 쓰는 것도 사랑하지만 읽는 것도 사랑해요. 최근에는 감정을 조절할 수 없어서 정세랑 작가님의 '시선으로부터'를 또 읽었어요. 읽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감정이 흩어지지 않아요. 신작이 얼른 나왔으면 좋겠어요. 브랜드북의 주제를 정세랑 작가님으로 잡을까 싶기도 해요. 만드는 동안 행복해질 것 같거든요. 저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해요. 아기자기한 걸 그리면 제 안에서도 따스함이 샘솟아요. 제 기억을 더듬어 푸드에세이를 쓰는 것도 좋아요. 쓰고 나면 그 음식을 먹을 때도 많아요. 제 인생을 그림이든, 글이든 어떤 식으로 든 간에 기록하고 있다는 거에 보람을 느껴요. 어릴 때는 광고가 만들고 싶었어요. 요새도 광고는 좋아요. 생각하는 것도 만들어내는 것도 지치지 않아요. 지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자꾸 언어가 좋아요. 외국계를 지망하려면 영어는 기본 이어야 하는데 영어보다 중국어가 좋아요. 공부하는 게 정말 즐거워요. 오랫동안 공부하고 싶어요. 유학을 가서 중국인들과 대화하고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요. 


지원동기 

한마디로 말하면 스펙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취직할 때 쓰일 한 줄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실제 지원서라면 이 말을 몇백 자로 풀어내야겠죠.


리더인가, 팔로워인가 

책임질 일이 많다면 리더는 사양이에요. 적성에 안 맞더라고요. 해보니까 별로였어요. 대신 팔로워가 된다면 다른 팔로워들보다 잘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팀원들과 갈등이 생긴다면? 

갈등이 커지기 전에 해결하면 좋겠지만 갈등이 커지면 만나서 찐한 대화를 나눕니다.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합의라는 이름의 양보와 포기를 일궈내는 게 목표예요.


팀원 중 한 명이 이탈한다면? 

일단 얘기는 해보고, 그래도 개선의 여지가 없으면 마음속으로 포기해요. 그리고 팀에서 제외시켜달라고 요청해봐야겠죠. 남은 팀원들끼리 돈독해질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나만 간절한 게 아니라 다 간절한 걸 알지만 내 간절함이 더 호감이면 좋겠어요. 다 부질없는 말이겠지만 잘할 수 있고, 잘 해낼 수 있는데, 나도 열정적인데. 












내가 쓴 게 자기소개서인지 일기장인지 알 수 없지만 원래 자기소개라는 게 그런 게 아니겠는가. 숱하게 나에 대한 얘기를 반복할수록 내가 닳는다는 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 자기가 만들어내는 찌꺼기가 자기보다 커지는 지우개처럼. 내가 좋아하는 게 괴로워질 때가 생겼다. 아직도 그 일을 하는 건 즐거운데도 그랬다. 이러다 그 일이 즐겁지 않을까 무섭다. 




다음 학기에는 또 죽어라 자소서를 써야겠지만 그 안에서 좋아하는 걸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모든 거지 같은 도전에 끝이 있기를 바라며. 나의 사라진 노력들이 다음 세대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되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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