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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Apr 21. 2021

나는 오래도록 살아남고 싶다

세대를 뛰어넘는 걱정들





서울에 올라가기 전 외할머니댁에 들렀다. 내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할머니. 한 다리를 건너뛰고 나는 할머니를 닮았다. 나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할머니에게도 듬성듬성 나타날 때 묘한 웃음으로 들뜨게 되는 게 내 즐거움이다. 친가와 외가는 모두 장수 집안이었는데 얼마 전만 해도 증조할머니와 외증조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 90 언저리를 넘어가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나 역시 막연하게 조부모님들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이 마냥 영원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외할머니가 아프신 건 재작년인가, 그 전해 즈음이었다. 보통 체격이었던 할머니는 이제 너무 말라서 기성품도 맞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만날 때마다 우리 강아지, 아니면 경은아, 인지 정은아, 인지 영은아, 인지 구별되지 않는 흐린 발음으로 날 부르시던 할머니는 아픈 곳이 많아졌다.








이번에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 댁에 가지 않으면 기껏 해봐야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할 텐데, 그런 건 할머니가 안 계실 때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생명에 비하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할머니와 같이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얘기했을 때, 할머니가 갑자기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또 언니를 살찌우라는 이야기인가 싶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할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요새 세상이 흉흉하니까 나서지 말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남의 일에 함부로 나서면 안 된다고. 얼마 전에도 여자 세 명이 죽지 않았냐고.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모른 척하라고. 너는 그럴 것 같다고. 남의 일에 발 벗고 나설 것 같아서 그러지 말라고. 계속해서 당부했다. 다리를 떨지 말라고, 다리를 모으고 앉으라고 말씀하실 때도 그렇게 강한 말투는 아니었다. 






할머니는, 최근 일어난 김태현 살인 사건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다. 여성들에게 행해지는 끔찍한 폭력의 사건들을 뉴스에서 보고 또 보고 작은 손녀를 생각하셨나 보다. 행여나 손녀가 그런 일을 당할까 봐, 나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을까 봐 걱정하고 계셨다. 그 걱정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알겠다고만 했다. 



그 얘기를 나를 불러 한번을 하고, 또 한 번을 더 했다. 걱정의 횟수였다.








얼마 뒤에는 엄마와 술을 먹다가 그런 얘기가 나왔다. 엄마는 제발 밤늦게 다니지 말라고 했다. 내가 술을 먹고 1시에 길거리를 쏘다닌 건 벌써 2년 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임에도 그랬다. 엄마는, 내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된다면 못 살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너 그렇게 되면 진짜 못 살아. 잔혹한 소식을 볼 때마다 엄마는 나 같아도 똑같이 복수하겠다고 항상 말해왔지만 이번에 한 말은 이상하게 가슴에 박혔다.




슬프고도 섬뜩한 느낌을 저버릴 수 없어 자전거를 탔다. 밤 9시,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원래 나는 새벽을 좋아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고등학생 때 과외가 끝나면 새벽 12시에서 1시였고, 아파트 안을 돌아다니며 새벽의 공기를 만끽했었다. 언젠가 새벽을 탐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새벽은 공포의 대상이었고, 나를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까만 밤은 낭만보다 두려움을 가져다줬다. 



죽음을 맞이하는 여성들이 이제 내 또래이고, 나보다 어린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뉴스는 남일이 아니었다. 누가 재촉하지 않아도 늦은 시간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피하는 게 슬프고도 우스웠다.






그래도 만일, 만일 내가 그런 일의 당사자가 된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불행을 잊기를 바랐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그 생각만 했다. 엄마가 그냥 살았으면 좋겠다고, 복수를 한다고 엄마의 삶을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저 간간히 슬퍼하면서 살아나가면 좋겠다고. 나였어도 복수를 하겠지만 그렇다고 나 때문에 복수를 하는 건 원하지 않는다.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증오가 얼마나 사람을 썩게 만드는지 나는 알고 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은 다 썩어 뒤틀리게 돼서, 결국 모든 걸 갉아먹고서야 끝나게 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러길 원하지 않는다.











요새 들어 갑작스러운 현실들에 슬펐다. 할머니는 사촌 오빠에게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겠지, 우리 엄마가 아들을 뒀더라면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겠지. 나는 오래도록 살아남고 싶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아남아 할머니와 엄마의 행복이자 위안이 되고 싶다.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곁을 지키고 싶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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