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집에는 항상 제철과일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빠가 과일을 특히 좋아하기도 하고 엄마도 군것질거리보다는 몸에 좋은 과일이 낫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뭐든 가리고 예민하게 구는 나도 과일에 대해서는 제일 좋아하는 과일, 두 번째로 좋아하는 과일, 세 번째로 좋아하는 과일, 같은 순으로 구분할 뿐이다. 무슨 과일이든 우리 집에 오면 환영받지만 유일하게 거리를 두는 과일이 있다. 바로 복숭아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바로 눈치챘을 것 같다. 식구 중에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는 거 아냐?당신의 예상은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엄마가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었다. 주위에 복숭아가 있으면 몸이 간지러워질 정도라 여름에는 과일 코너에 가는 것도 꺼려졌다.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은 복숭아와 멀어졌다. 아빠가 사서 깎아주는 방법도 있었지만 우리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엄마를 보면 내키지 않았다. 집에 복숭아가 있는 것도 엄마에게 해로웠다. 아빠는 복숭아를 먹지 않겠다고 선포했고 언니와 나도 그 결정에 따랐다.
엄마는 과일이라면 환장을 하는-그 시절은 인스턴트 음식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열광할 건 과일밖에 없었다-우리가 안타까웠는지, 황도 통조림을 즐겁게 먹는 우리가 불쌍했던 건지 외갓집에 갈 때마다 복숭아 한 상자를 사 갔다. 엄마의 어리광이었을지 욕심이었을지 모르겠다.
외할머니는 큼직큼직하게 복숭아를 썰었다. 깎은 복숭아는 제일 먼저 외할아버지를 하나 드렸다. 그러면 아빠와 나랑 언니는 금색 포크를 이리저리 찔러가며 복숭아를 먹었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우리가 맛있어하는지 꼭 확인하고 싶어 했다.
"어떻노? 맛있나?"
말랑하고 물렁한 복숭아. 매번 먹던 통조림과는 다른 맛이다. 그건 좀 더 불량식품의 맛에 가까웠다. 이건 살아있는 과일이었다. 우리가 가공된 것으로 가장 많이 접하지만 날 것으로는 가장 멀었던 것. 물 많은 복숭아는 탱글탱글하고 맛있었다. 싱그러웠다. 우리가 맛있다고 대답하면 엄마는 많이 먹으라고 했다. 외할머니는 한탄했다. 그럴 때면 꼭 칠흑 같은 밤이었다. 창밖이 조용한 곳에 앉아서 도란도란 복숭아를 먹는 게 여름날의 기억이다.
지금은 1년에 한 번 정도 복숭아를 사 먹는다. 엄마가 복숭아에 무뎌진 덕분이다. 얼마 전에도 복숭아를 먹었다.
맛있는 과일이니 맛있게 먹긴 했지만 마트에 갈 때마다 엄마는 복숭아가 먹고 싶지 않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글쎄, 하고 대답한다. 복숭아는 먹고 싶은 음식의 리스트에 끼이지 못했다. 나에게 복숭아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다. 복숭아를 먹으면 엄마가 불편하다는 상황이 동반된다. 누군가의 불편함과 고통을 기반으로 먹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복숭아는 그만큼의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복숭아는 우리 집에서 배제됐다.
가끔 나는 복숭아를 좋아했을 나를 상상해본다. 여름마다 복숭아를 사 먹고 냉장고에서 보들보들한 복숭아들이 끝도 없이 쏟아지는 날들을 상상해본다. 여름이 다가오면 복숭아를 기대하며 눈을 번뜩이는 나도 상상해보고, 여름인데 왜 복숭아를 안 사주냐며 땡깡을 부리는 나도 상상해본다. 자취를 하면서 복숭아가 먹고 싶어 창원으로 돌아가는 걸 다짐하는 나도 그 상상에 끼어있다. 다른 과일들에게는 익숙한 모습들이지만 빈칸에 복숭아가 들어가는 순간 순식간에 어색해진다.
그래도 만약, 어릴 적부터 줄곧 먹었다면 복숭아를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마음도 언젠간 바뀔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