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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Dec 01. 2021

고등어조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날이 생겼다

집 밖에 나가는 게 꺼려지는 매서운 날씨다. 이상하게 요즘 들어 고등어조림을 먹고 싶어 진다. 이건 분명 제휴식당의 영향이다.


나와 내 동기가 가장 좋아했던 한식당은 유일하게 생선을 취급하는 곳이었지만 추석 연휴 이후 폐업하고 말았다.  그 집에서 먹었던 건 온통 생선뿐인데, 주로 고등어조림이었다. 난 생선이라면 모두 아낌없이 사랑하지만 구이와 조림 중에서는 구이를 선호했다. 엄마가 자주 해준 방식이 굽는 것이기도 했고 나도 생선 본연의 맛이 잘 느껴지는 구이가 좋았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생선을 먹을 정도로 생선을 정말 좋아하는 나지만 서울에 올라온 뒤에는 그러기 힘들었다. 특히 직장을 다닌 이후부터는, 생선은 고사하고 스스로 밥을 지어 해먹지도 못했다. 그래서 생선을 파는 제휴 식당은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처럼 우리는 한식과 한식과 한식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는데 그날은 특히 제대로 된 한 끼가 먹고 싶었다. 연휴를 앞둔 금요일이라 잔뜩 들떠있었다. 그래서 제일 좋아하는 한식당을 찾았다. 나는 항상 먹던 고등어조림을 주문했고 웬일로 동기도 고등어조림을 주문했다. 맛있을 것 같다며, 한 번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 농담 삼아 오늘 조기퇴근을 했으면 근처 카페에 가서 브런치를 먹을 텐데, 하고 웃었다. 우리끼리 조기퇴근을 한다면 무엇을 했을지 상상해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집에 일찍 내려갈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근사한 식당에서 비싼 밥을 먹고 예쁜 카페에 갔을지도 몰랐다. 날이 좋으니 한강이 가도 좋고 바로 옆의 서울숲에 가서 놀아도 즐거울 것이다. 어차피 구속되어있는 몸,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날따라 밑반찬이 성대했다. 내가 좋아하는 미역국과 반찬들이 잔뜩 나왔고, 두툼한 계란말이는 유난히 포슬거렸다. 동기도 계란말이를 한입 베어 물고 맛있다며 눈이 동그래졌다. 이상하게 매번 먹던 메뉴였는데도 특별히 맛있게 느껴졌다. 아마 연휴 때문에 그런 게 틀림없었다.



팔팔 끓는 뚝배기에 커다란 고등어 한 토막이 담겨 나왔다. 고등어조림을 마지막으로 먹은 건 수련회였나, 수학여행 때였기 때문에 고등어조림이 어떤 맛이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했다. 대신 이곳의 고등어조림만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고등어는 내 주먹보다 클 정도라 살을 푸짐하게 맛볼 수 있었다. 뜨끈뜨끈한 고등어를 젓가락으로 발라 빨간 국물에 담갔다 꺼내 먹으면 부드럽고 짭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놈이라 그런지 너무 부드러워서 포슬포슬했다.


밥에 두툼한 고등어 한 조각을 올려 먹고, 미역국도 중간중간 먹었다. 계란말이는 애피타이저든 디저트든 뭐든 좋았다. 그날따라 일이 많았던 건지 피곤했던 건지 우리는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잘 먹었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밥상이었다. 회사로 돌아오는 발걸음도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반나절만 더 일하면 연휴라며 방방 뛰었다.






회사에 돌아오니 어딘가 어수선했다. 이상함을 느끼며 애써 업무를 보는데 같은 부서의 타인 턴들이 퇴근을 했다. 그때 동기와 은밀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설마 오늘 조기 퇴근하는 날인가? 물론 파트는 다르지만 같은 부서고, 단체로 반차를 썼을 리는 없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조기퇴근을 하는 날인 것 같았다.


물어볼 수 있는 사수는 막 밥을 먹으러 나간 것 같고, 사내 메신저도 카톡도 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일이 될 리가 없었다.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사수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더 지나서 돌아온 사수에게 조기퇴근을 하는 날이냐며 슬며시 물었다. 그랬더니 아마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속으로는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이제야 알려주냐고! 하고 분통이 터지는 기분이었지만 겉으로는 의연한 척 굴었다. 다행히 사수는 남은 업무는 연휴에 나눠서 하라며 먼저 가봐도 좋다고 했다. 물론 명절에도 일을 해야 한다는 건 끔찍했지만 중요한 건 퇴근이었다. 퇴근! 동기와 나는 순식간에 짐을 싸서 서울숲으로 떠났다.


조기퇴근을 한 우리들은 자꾸 웃음이 나왔다. 길을 걷다가도, 지하철을 타다가도, 자꾸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브런치 집에나 갈걸 그랬다고, 이런 날에 왜 고등어조림을 먹었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했다. 그래도 이상할 정도로 맛있는 고등어조림이었다. 우리는 맛있었으니 후회는 없다고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날은 좋았고 길거리에서 쇼핑도 하고, 가게에서도 쇼핑을 했다. 쇼핑 후에는 그나마 사람이 적고 예쁜 카페에 들어가 앉아있었다. 그곳에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하니 꿈만 같았다. 오후 네시에 길에서 음료를 마실 수 있다니. 엄청난 축복이었다. 거기서 왜 나의 사수는 조기퇴근의 존재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았고, 왜 동기의 사수는 조기퇴근이 있다는 것도 몰랐는지 이야기했다. 오래 기억에 남을 날이었다.




 






내가 퇴사하기 전까지 우리는 종종 그날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이제는 사라진 식당과 고등어조림에 대해, 그날 얼마나 재밌었고 즐거웠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이제 창원에서 생활하고, 동기는 퇴사 후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떠나게 된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3개월 정도였고 시간이 흐르면 서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잊을 것이다. 매일 보던 사이지만 못 보게 된다고 슬퍼지거나 외로워질 관계도 아니다. 그렇지만 고등어조림을 함께 먹은 그날만큼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겠지. 보글보글 끓는 생선을 볼 때마다 그날을 떠올리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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