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열음 Jan 09. 2022

된장찌개

찌개 하나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담겼을까

음식 솜씨가 없으신 외할머니에 비해 마산 할머니는 요리를 굉장히 잘하신다. 절대 주관적인 평가가 아니다. 우리 집안의 모두가 꽤 알아주는 솜씨다. 할머니의 남편과 아들들은 별다른 칭찬은 하지 않지만 할머니의 밥을 먹을 때면 한 그릇 더, 하고 금방 빈그릇을 내민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할머니 댁에 간다는 건 고봉밥 두 그릇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많이 먹을 수 있도록 편한 옷을 입고 그 전의 식사는 간단하게 해결한다. 할머니의 밥을 누구보다도 맛있게 먹는 예쁜 손녀가 될 준비를 마친 것이다.

 

할머니는 마을 원님이나 받았을법한 상을 뚝딱뚝딱 차려낸다. 여러 반찬들을 먹으면서 느끼는 건대 할머니가 식당을 하셨으면 잘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게 난 태어나서 할머니의 된장찌개만큼 맛있는 찌개를 먹어본 적이 없다. 동치미나 김치나 고추장도, 모두 할머니의 손 아래에서는 예술품으로 태어난다. 그래서 아주 가끔은 반찬가게나 식당을 연 할머니를 상상해본다.


동네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골목길에 위치한 작은 가게. 테이블은 네다섯 개 정도지만 언제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할머니의 된장찌개는 보글보글 끓고 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밥은 고소한 냄새를 풍긴다. 이건 상상만으로도 꽤 즐겁다. 어쩌면 우리는 할머니의 식당일을 도왔을지도 모르고, 그곳에서 또 새로운 추억들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고......


할머니가 식당을 하고 싶었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의 된장찌개는 온 세상 사람들이 맛봤으면 좋겠으니까!






다른 가정의 사정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일주일에 다섯 번은 된장찌개가 식탁에 올라온다. 거짓말 같겠지만 사실이다. 끝내주는 된장찌개를 끓이는 할머니 밑에서 자란 아빠는 된장찌개를 제일 좋아한다. 우리 집은 식사 때마다 국을 챙기지는 않는데 그 자리는 언제나 된장찌개가 대신하고 있다. 엄마의 된장찌개는-엄마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할머니의 된장찌개보다는 맛이 없다. 엄마 말로는 똑같은 재료와 방법으로 끓였다는데 내 입에는 전혀 다르다. 이게 아마 손맛의 차이일 것이다.



할머니는 된장과 고추장도 직접 담그시는데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메주를 본 적이 있다. 그때는 한참 옥떨매-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라는 말이 유행했을 시절이라 메주는 나에게 관심거리였다. 울퉁불퉁하고 쩍쩍 갈라진 메주. 꾸러미처럼 생긴 메주가 방구석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저렇게 이상하게 생긴 애들이 내가 먹는 된장이 된다니, 그건 참 신기했다. 그날도 된장찌개를 먹었을 테고, 난 금이 간 메주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메주를 만들고 된장을 만들고, 하나의 된장찌개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할머니가 나에게 여기 오는 게 시간 아깝지 않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다. 그 물음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한 때는 할머니 댁에 찾아가는 게 시간낭비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나의 부모가 아닌, 내 가족의 부모이고, 한 세대를 거쳤을 뿐인데도 나에게는 친하지 않은 반 친구보다도 훨씬 더 먼 존재였기 때문이다. 난 사실 아직도 할머니가 나에게 주시는 사랑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난 당장 할머니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프로를 좋아하고, 어떻게 하루를 보내시는지도 모른다. 그건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할머니 역시 나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다. 피가 이어져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끝없이 만남을 가지고 시간을 보낸다. 할머니에게 내가 몇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도 할머니가 손에 꼽을 만한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난 할머니가 행복하시길 바라고 할머니 역시 그렇다는 점이다. 내가 할머니를 찾아뵙고 같이 밥을 먹고, 드라마를 보면서 별 것도 아닌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언젠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이다. 분명 할머니가 그리워질 때가 있을 걸 알기 때문이다. 내 삶은 유한하고 그 안에서도 특히 유한한 것들이 있다. 우리 가족이 다 같이 할머니 집에 방문하는 것처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걸 아는 순간들이 있다. 난 욕심쟁이라서 그런 순간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손에 쥐고 싶었다.


그래서 할머니께 망설임 없이 전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이제는 아니까.






할머니는 우리가 찾아갈 때면 된장찌개를 끓이고, 불고기를 만들고, 겉절이를 무친다. 언제나 상의 가운데에서 우릴 반기는 건 커다란 뚝배기에 담긴 된장찌개다. 할머니가 직접 만든 된장으로 끓여낸 된장찌개. 찌개는 된장의 구수한 맛으로 시작해 깊고 짙은 맛을 냈다가 마지막은 얼큰하게 마무리된다. 우와, 하고 저절로 숟가락이 뛰어드는 맛이다. 정신없이 먹으면 한 그릇은 금방 비운다. 할머니는 내가 복스럽게 먹는다며 기뻐하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방긋방긋 웃으며 맛있게 밥을 먹는 것뿐이다. 토요일에도 난 밥을 두 공기나 비웠다. 역시 할머니의 된장찌개는 맛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등어조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