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열음 Nov 07. 2021

구운 계란

장소를 바꿔버리는 마법을 아시나요

요즘에는 구운 계란을 먹을 일이 많다. 구운 계란은 회사 간식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음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허기질 때면 간식 서랍에 가서 구운 계란 두 개를 손에 들고 온다. 책상에 두드려 하나를 툭 까고, 입안에 쏙 집어넣는다. 내 입 안이 큰 건지 계란이 작은 건지, 계란은 딱 한 입 사이즈다. 두 개지만 두 입 짜리다. 씹는 동안은 입안이 가득 찬다. 계란을 먹을 때면 내가 창문 없는 사무실 안에 있다는 것도 잊을 수 있었다.







어릴 적에는 달에 한 번은 목욕탕에 갔다. 금요일 저녁이나, 주말이나. 집에서 5분 떨어진 곳에는 큰 대중목욕탕이 있었다. 나는 목욕탕에 가는 걸 더럽게 생각했는데 그곳의 바닥에는 누구의 몸에서 떨어졌을지도 모르는 물방울들이 군데군데 숨어있어서였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도 갑자기 발이 축축해지는 순간, 먹기 싫은 야채를 씹은 것처럼 인상이 구겨졌다. 바닥에 뿌려진 머리카락도 싫었고 사람들이 옷을 훌렁훌렁 벗는 것도, 피하기 힘든 물방울들도 싫었다.


엄마는 혼을 내기보다는 회유를 선택했다. 엄마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회유 방안을 떠올렸는데 첫 번째는 떡볶이와 오뎅이었고 두 번째는 얼음, 세 번째는 구운 계란이었다. 목욕탕이 있는 골목의 시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떡볶이 집이 있었다. 목욕을 하고 돌아갈 때면 엄마는 떡볶이와 오뎅을 사주는 일에 관대했다. 지금이야 내가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지만 어릴 적에는 그것만큼 매력적인 기회가 없었다. 얼음도 그랬다. 엄마는 이가 상한다고 얼음을 못 먹게 했기에 내 안에는 얼음도 '어른'이 돼야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여름마다 얼음 한 컵을 씹어먹는 아빠를 부러워했다. 목욕탕에 들어가기 전, 입구 쪽에 커다란 컵과 제빙기가 있었다. 목욕탕에 갈 때면 내가 컵 가득 얼음을 먹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분홍색 컵에 얼음을 마구 퍼서 온탕 안에서 먹는 게 나의 행복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가장 많이 목욕탕을 따라간 이유는 구운 계란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때는 엄마가 절약을 실천할 때였고, 집에서도 먹을 수 있는 계란을 사 먹는 게 엄마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나 보다. 그도 그럴 게 엄마가 우선 음식에 흥미가 없었고 구운 계란에는 더욱 흥미가 없었다. 씻고 나온 사람들이 평상에 앉아 계란을 까먹는 걸 보고 엄마에게 먹고 싶다고 떼를 썼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저 까맣고 동그란 걸, 유달리 먹어보고 싶었다. 미디어의 영향도 컸다. 찜질방에 가서 식혜와 구운 계란을 먹는 게 우리나라가 인정하는 문화였다. 양머리가 유행했던 바로 그때였으니까. 찜질방은 부모님이 싫어해서 못 갔지만-깨끗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다-계란은 여기서도 먹을 수 있었다.


엄마가 사준 계란은 세 개 짜리였는데 언니 하나, 나 하나, 나머지 하나는 언니랑 나랑 반반을 나눠먹었다. 평상에 쪼그려 앉아 먹었던 계란이 얼마나 맛있던지. 계란을 먹으면서 보니 평소에 보지도 않던 티비 프로도 재밌었다. 엄마는 그게 그렇게 맛있냐고 물었고 언니랑 나는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었다.


고등학생 때였나, 스무 살 때였나, 나름 얼마 전에도 엄마가 목욕탕에 데리고 간 적이 있다. 가기 싫다는 나를 붙잡고 한 번만 가서 때 좀 벗기자고-내가 그렇게 더럽나?-사정사정을 했다. 구운 계란을 사주겠다는 말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고 말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오랜만에 구운 계란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는 건 삶은 계란만 판다는 비극적인 소식이었다. 뭐라고요? 삶은 계란만 판다고요? 세 번은 물은 것 같다. 엄마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울고 싶었다. 열 살만 어렸더라도 바닥에 앉아 울었을 텐데. 울지는 않았지만 속상하고 우울한 마음에 입이 댓 발 튀어나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차선책으로 슈퍼에 들어가 '구운 계란'이라고 적혀있는 뭉치를 다. 빨간 그물망에 들어있는 계란 두 개를 손에 쥐고 들뜬 마음으로 돌아왔다. 계란을 톡톡 깨고 소금을 살짝 묻혀 한 입 깨물었는데 끔찍한 맛이 났다. 분명 계란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맛이었다. 얘를 구운 계란으로 부른다면 구운 계란이 고소할지도 모를 정도의 맛. 우주 식량이 이런 맛이 아닐까. 울면서 계란 두 개를 입에 쑤셔 넣었다. 이것도 거짓말이면 좋을 텐데. 현실은 가혹했다.


 그 뒤로도 구운 계란을 만날 일은 없었고, 구운 계란의 맛조차 까마득해져서 구운 계란이 먹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회사 간식 서랍이 있는 선반에 놓여있는 구운 계란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곳에서 본 구운 계란은 내가 잊고 있었던 오래 전의 선물 같았다. 하나를 들고 와 먹어봤더니 그때 먹었던 맛이 났다. 내가 이런 맛을 좋아했었지.


한 번 맛을 보니 자꾸 생각난다. 자꾸 먹고 싶어 진다. 먹을 때마다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구운 계란과 함께라면 회사도 괜찮을지도. 아마도, 괜찮을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모카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