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열음 Nov 18. 2021

메론소다

이별은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날이 따뜻한 일요일 오후다. 이번 일주일은 거짓말처럼 추웠는데, 얇은 옷만 들고 왔던 나는 결국 심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간만에 열이 올라 회사도 하루 쉬게 되었다. 두통이 심하기도 했고, 열도 나니 이 시국에 나가기는 위험했다. 그리고 어차피 아직 일주일은 더 일해야 하니까 차라리 하루를 푹 쉬는 게 미래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요일 오후, 마지막으로 내가 청파동에 머무르는 날이다. 날도 따뜻해 유난히 센치해진다. 집과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오붓하게 집에서 머무르고 싶었지만, 카페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발을 한 번이라도 헛디디면 병원으로 가게 될 가파른 언덕길을 지나, 횡단보도 하나를 지나게 되면 그곳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카페가 있다. 미로틱청파, 이름만큼 낭만적인 카페다. 움직이기 힘든 주말에 나를 학교 밑까지 불러낸 이 카페는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여태껏 수많은 식당이 없어지거나 사라질 때 이렇게까지 아쉬움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미로틱청파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미로틱 청파의 최애 메뉴는 누가 뭐라 해도 메론소다다. 지금 이 글도 메론소다를 마시면서 쓰고 있으니, 메론소다가 최애 음료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곳의 메론소다는 하얀색 음료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스쿱이 올라가 있다. 아이스크림을 녹여서 음료와 섞어먹어도 맛있고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살살 퍼먹어도 맛있다.


메론소다를 처음 알게 된 건 일본 여행에서였다. 일본의 가라오케는 가격만큼 음료 서비스에 후한 편이었는데 그곳에서 메론소다를 처음 마시게 됐다. 메론소다를 처음 먹은 감상은 메로나랑 탄산수랑 섞은 맛이다,였다. 한국인이라면 역시 메론소다를 설명할 때 메로나가 빠질 수가 없다. 맛있었지만 기묘했다. 아이스크림으로 가야 할 녀석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건 아닌가 싶을 만큼.


근데 이상하게도 그 뒤로도 자꾸 메론소다가 생각나곤 했다. 더운 여름날이나, 목이 바짝바짝 말라 타들어갈 때면 불현듯 메론소다가 생각났다. 뭔가 특별하거나 대단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기묘한 맛이라 그런지 자꾸 생각나는 맛이었다.


알다시피 한국의 카페에서 메론소다를 파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그래서 이 카페에서 메론소다를 판다는 건 꽤나 기쁜 소식이었다.






대학가의 맛집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우리 학교 애들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주로 학교 커뮤니티인 에타에서 맛집에 관한 정보를 얻는다. 학교 게시판에 글이 올라오는 빈도로 맛집을 유추해볼 수 있다. 호불호가 갈리는 맛집이 있고 누구나 사랑하는 맛집이 있다면, 미로틱청파는 후자에 속했다. 폭신폭신해 보이는 수플레 팬케이크나 메론소다, 밀크티의 사진을 볼 때면 언젠가 여기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계속 들었다.



누구와 처음으로 미로틱청파에 왔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미로틱청파는 생각보다 아기자기하고, 낭만적이고,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는 곳이었다. 노곤 노곤한 조명 아래 다른 카페와는 완전히 다른 구성의 음료들을 맛볼 수 있다. 커다란 원목 테이블과 의자들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스무 명도 못 들어갈 작은 카페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은 크기였다. 군데군데의 장식들은 빈티지스럽다. 누구나 좋아할 빈티지다.



이곳은 화장실도 꽤 유명하다. 누구나 들어가고 싶은 화장실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문장이지만 사실이었다. 사진을 잔뜩 올리고 싶은 내 욕심도 다들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느긋하게 앉아있고 싶은 화장실은 처음이다. 사람들이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공간을, 외부에서 사용한다면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공간을, 한 번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곳으로 만든 건 대단한 일이다.


이곳에서 나는 항상 메론소다를 시켰다. 원래 같은 카페를 여러 번 가면 다른 음료를 시키는 게 나의 철칙이지만 이 카페에서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은 기필코, 하고 다짐하지만 메뉴판을 받으면 언제나 메론 소다 하나요, 하고 말하고 만다. 아는 맛이 무섭다는 게 딱 그 말이다.


동그랗게 올려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살살 떠먹는 것도 즐겁고, 투명한 음료를 빨아 마시는 것도 즐겁다. 이렇게 맑은 빛깔에서 어쩜 그렇게 짙은 녹색의 맛이 나는지 궁금하다. 이곳에서 메론소다를 마시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가지고 있던 고민도 사르르 녹는다. 답답한 마음도, 시원한 메론소다로 뻥 뚫리게 된다.



음료라면 메론소다지만, 이곳의 비장의 무기는 바로 수플레 팬케이크다. 내가 이전에 수플레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수플레 팬케이크를 먹은 후로 수플레에 대한 나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맛이 없었던 건 그 집뿐이었다. 이곳의 수플레는 줄곧 내가 그려왔던 수플레처럼 폭신폭신하다. 처음 수플레가 나오면 따끈따끈해서, 시럽을 뿌리고 썰어서 한 입 베어 물면 입안에 따끈함이 퍼진다. 혼자서 두 접시는 거뜬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맛이다. 나의 이상향이 온전히 실현된 기분이었다.






난 언제나 좋아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았다. 지금 이 시간을 더 즐겁게 보내기 위해 찾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이야기, 좋아하는 장소를 더 한다면 더 행복해질 테니까.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게 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아무리 예고한 이별이라 해도 그렇다.


오늘은 내가 살아온 청파동과, 내가 살아온 집과, 내가 좋아하는 카페와 이별하는 날이다. 이별은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평생 나는 이별에 익숙해지지 못할 것이다. 대신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그리워하기로 했다. 그것 또한 애정의 증표니까. 앞으로 메론소다를 마실 때마다, 영원히 이 카페가 떠오를 것이다.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메론소다를 마실 때면, 메론소다가 생각날 때면, 미로틱청파를 떠올릴 것이다. 내가 사랑한 공간이었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구운 계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