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라면 빙수다. 사실 여름이 아니어도 난 빙수를 좋아한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밥을 먹고 배부르게 음료 한 잔을 마시는 건 무의미하다. 언제나 음료보다는 빙수 쪽이 좋다. 시원한 얼음을 사각사각 씹으면 더위도 사르르 녹는다. 빙수라면 대부분 '팥'빙수를 떠올릴 텐데 안타깝게도 팥빙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거 아는가? 팥은 콩의 사촌이다. 실제로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 안에서는 그렇다. 팥이나 콩이나 똑같이 불쾌한 맛-내 입장에서-나기 때문이다. 시판으로 파는 끈적끈적하고 달콤한 팥은 눈감아줄 수는 있지만 가게들은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옛날 팥빙수를 주장하며 직접 팥을 삶기까지 한다. 정성과 노고가 가득 들어갔지만 내 입장에서는 빙수 위에 콩을 올려먹는 기분이다. 정말....... 끔찍하다.
가끔 우리 집에서는 유행하는 음식이 있는데 -다른 집도 이와 비슷할 것 같다-한 음식에 꽂히면 그 집에서만 그 음식을 먹었다. 그것도 꽤 자주. 지금 우리 집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녀석은 시내 베이커리에서 파는 녹차빙수이다. 전성기는 말 그대로 전성기라서 자칫하다가는 거기 맛이 변해서 별로야, 너무 많이 먹어서 물렸어,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니 전성기는 마음껏 누려줘야만 한다.
사실 난 녹차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 같은 편식쟁이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자연의 냄새가 좋다고 맡아도 비가 많이 온 다음날이면 비린내를 맡곤 한다. 녹차도 비리다. 굉장히 비리다. 현미녹차나 보리 녹차가 아니라 '진짜' 녹차는 비려서 먹지 못한다. 그래도 녹차 빙수는 좋아한다.
날 굉장히 행복하게 했던 빙수집들은 어느 순간 다 사라져 버려서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 집 밖에 남질 않았었다. 기타 카페들은 여름에만 빙수를 파니 여름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아이스 음료와 아이스크림은 사시사철 팔면서 빙수에게만 냉담하기 그지없다. 시내 가는 길에는 2층짜리 큰 베이커리가 있었다. 체인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큰 규모였다. 빙수를 판다는 현수막을 가게 밖에 붙여놓은 덕분에 나는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곳의 빙수는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대야만 하다. 처음에는 치킨만 한 가격의 빙수를 보고 눈물을 살짝 흘렸지만 대야만 한 빙수를 보고는 그런 마음도 싹 가셨다.
빙수 위에는 커다란 하겐다즈 녹차맛이 한 스쿱 올라가 있고 잘 갈린 빙수는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사각사각. 입에 넣으면 소리가 날 것만 같다. 적당히 가공되어 쌉쌀한 녹차맛이 날 반긴다. 꾸덕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과 쌉쌀하고 시원한 빙수는 완벽한 파트너다. 밥을 먹고 남은 찝찝함도 정전기처럼 잔잔하게 쌓여있는 스트레스도 빙수와 닿으면 녹아 없어진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크기에 친구랑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그걸 다른 친구에게 소개해주고, 가족들에게 소개해주고. 이제는 우리 가족의 여름 주식이 되었다.
이전까지 나는 원래 녹차 빙수는커녕 녹차 아이스크림도 쳐다보지 않았었다. 내가 녹차 빙수를 처음 먹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3년 전 겨울이었다. 제일 친한 친구-아마도-와 후쿠오카를 갔었다. 지금이야 너무 오래돼서 즐거웠던 기억들이 단편으로 떠오르는 정도였다. 거기에서는 잊을 수 없는 일을 겪었는데-이전에 썼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내 여행 경비가 모두 들어있는 지갑을 잃어버린 것이다. 쇼핑백에 짐과 지갑을 넣어서 들고 다니다가 쇼핑백을 잃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그게 둘째 날이라서 마지막 날은 초상집 같은 기분으로 보냈다.
마지막 날은 학업으로 유명한 신사에 가서 기모노 체험을 하고 돌아와 아뮤 플라자에 갔었다. 우리가 여행을 갔을 때는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추웠는데, 기모노를 입은 동안 예쁘게 사진을 찍고 싶어서 겉옷 하나도 걸치지 않고 돌아다녔었다. 브이를 하고 싶어도 추위 때문에 손이 얼어서 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은 다했다.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이곳저곳 돌아다녀서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다. 그곳에서 피로를 달래기 위해서 말차 빙수를 먹었다. 원래는 다른 빙수를 시켜서 나눠먹을 생각이었는데 이곳은 1인 1 빙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추운 날씨에 1인 1 빙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던 게 뚜렷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빙수를 안 시킬 수도 없고 유명한 집이라는데 꼭 먹어보고 싶었다. 결국 각기 다른 맛으로 하나씩 빙수를 주문했다. 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니 빙수가 나왔다. 1인 1 빙이라면서 생각보다 큰 크기에 살짝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얼어 죽을 것 같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녹차 빙수를 먹는 순간 맛있다, 하고 느끼진 않았다. 그 상황에서도 내 입맛은 냉정했다. 쌉쌀하고 녹차맛만 나고. 자꾸 인상을 쓰게 됐다. 그렇지만 얘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숟가락이 움직였다. 맛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먹고 있었다. 먹을수록 쌉쌀함은 옅어지고 숲 같은 맛만 남았다. 녹차에는 사람을 힘나게 하는 뭔가라도 들어있는지, 앉아서 이 커다란 빙수를 해치우는 생각만 하고 있으니 지갑을 잃어버린 일도 옛날처럼 느껴졌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곳에서 먹은 건 완전히 얼음빙수였는데 그 차가움이 내 머리까지 얼려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내 친구는 그 부근에서 삼각대까지 잃어버려서 완전히 엉망진창인 여행이었다.
그날 이후로 녹차 빙수를 싫어하지 않게 됐다. 누군가 녹차 빙수를 먹자고 물어도 예전처럼 나 녹차 싫어해, 하고 단호하게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것도 나쁘지 않아. 이렇게 말하게 됐다. 좋아하지 않은 음식이라도 서서히 내 기억에, 내 삶에 흡수되는 형태로 반기게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녹차에게서 여전히 비린내를 느끼지만, 녹차 아이스크림을 찾아먹을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녹차에게 마음을 여는 중이다. 적어도 녹차 빙수를 먼저 먹자고 권할 정도는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