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거하게 식사를 하고 온 날 오랜만에 장염에 걸렸다. 내가 의사가 아니니 장염에 걸렸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에게 쌓아온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보면 걸린 게 확실했다. 장염에 크게 걸린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여름날,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질 뻔했다. 계단을 잡고 더듬더듬 내려가는데도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어지러웠다.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먹을 때마다 화장실에 갔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도져있던 시기라서 화장실은 크게 상관없었지만 어지럼증이 문제였다. 앉아있는 게 힘들 정도라 매일 같이 조퇴를 하거나 하루 종일 보건실에 누워있었다. 고3이었지만 변변치 않은 몰골이어서 선생님들은 보건 실행을 쉽게 허락해줬다. 일주일 동안 3kg 가까이 빠져서 교복도 못 입을 정도였다. 학교를 빠지는 건 좋았지만 그런 기쁨도 느끼지 못할 만큼 아팠던 때였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루 이틀을 심하게 앓다가 멀쩡해져서 몸무게는 순식간에 원상복귀가 되었다. 더 길었다면 인내심도 바닥났을 것이다. 아픈 동안에는 오랜만에 죽을 먹었다. 전문 프랜차이즈 죽집에서 무려 전복죽을! 먹고 싶은 죽을 시키라는 말에 주저 없이 선택한 음식이었다.
난 죽을 싫어한다. 지금도 싫어한다. 아무리 아파도 죽을 먹지는 않았다. 어릴 때 죽의 선택지가 넓지 않아서 더 그랬다. 노란 빛깔의 호박죽이나 허여 멀 건한 흰 죽, 쌉쌀한 맛을 자랑하는 전복죽. 딱 세 개 밖에 없었다. 밥의 고슬고슬함을 좋아하는 나에게 죽은 물배가 차는 것처럼 배부르지도 않게 배를 불리는 음식이었다. 난 식감을 즐기는 걸 좋아한다. 맛이 다채로운 것도 좋아한다. 죽은 씹는 맛도 없고 맛도 없었다. 그래서 물에 만 밥을 먹을지언정 죽은 먹지 않았다.
죽을 먹기 시작한 건 프랜차이즈 죽 집의 맛을 보고 나서였다. 고등학생 때 나는 8교시마다 병원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감기와 위염을 번갈아 앓았는데 주종은 위염이었다. 2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위 내시경을 해봤을 정도였으니 말은 다했다.
스트레스성 위염. 아마 현대인이라면 앓고 있을 질병이다. 안타까운 점은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편이었다는 것이다. 뾰족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부딪히면 자지러질 것처럼 굴었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생기면 30분 이내로 극심한 통증을 토로할 정도였다. 그렇게 되면 대체적으로 조퇴를 하거나 야자를 빠지거나 병원을 가거나 보건실에 갔다. 넷 중에 하나는 무조건이었다. 나름 내신은 신경 썼기 때문에 조퇴는 치명적이었고 야자는 선생님의 재량이었으며 보건실은 학교에서 제일 불친절한 곳이었다. 그러니 병원을 택할 수밖에. 가끔은 끼니를 거르고 잠잠해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내가 만든 질병을 내가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감당할 수 있었으면 애초에 병도 안 생겼을 것이다.
8교시에는 주로 보충 수업을 했다. 자습을 하기도 했고. 중요한 건 내신과는 크게 관계없으며 수능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모호한 선에서 수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병원이 8교시가 끝나는 5시 반 이후에는 문을 닫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외출증-외출증이지만 조퇴증이라고 적혀있었던 것 같다-을 한 손에 달랑달랑 들고 야자를 하지 않는 애들과 함께 교문을 빠져나갔다.
혼자서 병원에 갔다가 오는 길에는 죽을 샀다. 죽집에는 종류가 너무 많았고 내가 먹어본 건 전복죽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만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메뉴판을 곰곰이 살펴봐도 내 마음에 드는 건 전복죽뿐이었다. 뜨끈뜨끈한 죽을 받아 들고 달랑달랑 학교로 향했다. 병원에 갔다가 약을 타고 죽을 사 와도 50분 안에는 충분히 돌아올 수 있었다. 교실에 도착할 때면 종이 울렸다. 그러면 친구들과 함께 팔짱을 끼고 급식실로 내려갔다.
우리 학교는 급식이 맛없는 걸로는 소문이 자자했다. 오죽하면 김자반을 봉지째 들고 다니는 애가 있을 정도였다. 죽을 사 온 날이면 나는 급식을 받지 않고 죽을 먹었다. 그날의 급식이 유난히 맛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애들은 내 죽을 탐냈다. 나도 한 입만, 하면서 저마다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따끈따끈한 죽은 맛있었지만 가성비가 좋아서 혼자서 먹기에는 너무 많았다.
위염이 옮는 병이 아니어서 그럴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옮는 병이었다면 내가 먹기 전에 자기 식판에 덜어가서 먹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나는 아프지도 않은데 죽을 먹는 애들이 신기했다. 맛있긴 했지만 나는 맛있는 죽보다는 적당히 맛없는 밥이 좋았다. 밥이니까. 여고생들의 먹성은 누구보다 좋다. 애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먹고 나서도 내 죽을 뺏어먹었다. 나야 남기는 것보다 먹고 치우는 게 편했다. 누군가는 아픈 애 꺼 그만 뺏어먹으라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누구였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 일은 이벤트처럼 가끔씩 계속 일어났다.
이제 같이 밥을 먹은 친구 중에 몇 명만 내 곁에 남았고 죽을 같이 나눠먹을 일은 없다. 죽은 맛없고 정말 아파서 다른 건 먹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내가 선택하고 마는 최후의 음식인데 전복죽을 사 올 때면 자꾸 급식실이 생각난다. 떠오르지 않는 목소리들이 울리는 것 같아 외롭지가 않다. 그럴 때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혼자 먹는 전복죽은 맛이 없다. 강렬하게 누군가와 나눠먹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