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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May 25. 2022

아이스 아메리카노

누군가의 응원이 담겨있는

내 삶은 언제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운동을 시작했다. 자전거를 매일 같이 탔었고 몇 달 동안은 테니스도 배웠다. 하지만 퇴사 후에는 한동안 운동을 못했다. 체력도 너무 많이 떨어진 데다가 온몸에 도진 피부염 때문에 땀 흘리는 건 최대한 피하라는 의사의 권고 때문이었다.



나는 매일 웹툰을 보는 웹툰광인데-웹툰 평론을 쓰고 싶은데 어떤 작품이 좋을지 고민된다-그중 정말 좋아하는 일상툰이 있다. 카카오 웹툰의 '슬프게도 이게 내 인생'이 그 주인공이다. 줄여서 '슬이 인생'은 작가님의 일상을 담은 가벼운 일상툰이다. 우울할 때면 정주행 하고, 매주 꼬박꼬박 챙겨봐 왔는데 작가님이 어느 날 크로스핏 경험담에 대해 그려주셨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 편하게 운동하고 싶었기 때문에 운동에 흥미가 생긴 이후로는 줄곧 혼자 운동을 했었다. 그런 나에게 크로스핏은 각자 하지만 서로를 응원해주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언제나 스포츠물의 '함께', '팀'을 기대한 나에게는 비교적 매력적으로 보였다. 찾아보니 단시간에 고강도로 진행되는 운동으로 다양한 기구를 사용해서 운동을 했다.


개인 PT를 받을까 싶었는데 PT보다는 크로스핏이 더 재밌어 보였다. 그렇게 피부염도 낫고, 토플도 끝나고, 교환학생 지원도 끝났을 때 크로스핏을 가게 되었다. 정말 다행히도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자전거로 충분히 갈 수 있었다-에 크로스핏이 있었다. 하루 동안 무료체험권이 있어서 결제해서 갔었다.




세상에서 그렇게 긴 20분은 처음이었다. 지금은 흐릿하지만 첫날 했던 건 팔 굽혀 펴기와 턱걸이, 스쿼트였던 것 같다. 그걸 번갈아가면서,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세트를 진행해야 했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는 악바리로 꾸역꾸역 해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은 다리가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 그 후 거의 일주일 동안 근육통에 시달리는 바람에 그다음 주에 크로스핏에 등록할 수 있었다.




단시간 고강도. 크로스핏에서 운동하는 시간은 길지 않다. 하지만 운동을 하면 그렇게 힘들고 상쾌할 수가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처음 보는 사람이든 아니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나눈다. 탈의실에 짐을 두고, 물병만 챙겨서 나가면 된다.


운동 시간보다 몸을 푸는 시간이나 준비 운동을 하는 시간이 더 길다. 처음에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영 내키지 않았는데 요새는 생각이 바뀌었다. 고강도 운동을 짧은 시간 안에 하는 거니까 다치지 않고 몸을 풀어주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어진 것이다. 스트레칭할 때의 시원함도 한 몫한다.





매일매일 정해진 와드가 있다. 와드라는 건 하루에 해야 하는 운동량을 말하는 건데 전날 저녁이 되면 밴드에 다음날 진행할 와드를 알려준다. 처음에는 거기서 보고 재밌어 보이는 날에만 갔는데 이제는 웬만하면 다 가려고 한다. 와드를 할 때 파트너가 있는 경우도 있고 혼자서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다. 파트너가 있으면 내가 직접 운동 개수를 세지 않아도 되고 중간중간 응원도 해준다. 그리고 파트너의 운동이 끝나면 바로 내가 운동을 해야 하니 강제로 페이스도 조절된다. 다만 힘들 뿐이다. 혼자서 할 때면 마음은 편하지만 조금 외롭다. 페이스도 살짝 느려진다.







크로스핏의 장점은 모두가 서로를 응원한다는 점, 그리고 나한테 맞는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 같은 경우는 윗몸일으키기 1개도 불가능한 코어 제로 인간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제일 낮은 수준으로 운동을 진행한다. 운동 몇 번만 시켜도 내가 어느 정도인지 알기 때문에 기존 와드에서 내 수준으로 따로 지정해주신다. 가끔 무리하게 지정해줄 때도 있지만 원래 못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어야 크로스핏이다. 체력이나 근력이 조금씩 늘어가는 게 보여서 훨씬 뿌듯하다.






그리고 크로스핏은 질리지가 않는다. 줄넘기를 해야 할 때면 울면서 도망가고 싶지만 그 외에는 다채로운 운동들을 한다. 기구를 최대한 많이 활용하기 때문에 재밌을 수밖에 없다. 데드리프트나 row나 Wall Ball이 내가 좋아하는 운동들이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운동을 꼽으라면 놀랍게도 달리기다.









200m Run. 이렇게 적힌 걸 보고 나는 트레드밀이나 탈 줄 알았지, 지하 1층에 있는 체육관에서 밖으로 뛰어나가서 길거리를 활보할 줄은 몰랐다. 실외 마스크가 해제된 첫날이었다. 200m 달리기를 하고 다시 체육관으로 내려와서 운동을 해야 하는데 이걸 7분 동안 반복했다. 총 3세트. 크로스핏이야 항상 토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지만 이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내가 못하는 운동은 딱 세 개다. 윗몸일으키기, 줄넘기, 달리기. 이건 태어났을 때부터 못했다. 줄넘기 1000개보다는 달리기가 낫겠지만 그래도 끔찍했다.





태양이 짱짱하게 내리쬐던 5월.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열댓 명이 되는 사람들이 길가를 질주했다. 하필 체육관은 또 번화가 중심이어서, 아침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처음에는 같이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금세 뒤처졌다. 원래 크로스핏은 나처럼 코어가 없는 사람이 오기보다는 경찰이나 소방관 준비생들이 많았고, 여자애들도 운동을 이전에 해본 적 있거나 운동 신경이 뛰어난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도 해본 적 없고, 운동 신경도 최악인 나는 더더욱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어서 타격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체육복을 입고 혼자 시내 한복판을 뛰어다니는 건 부담스러웠다.




한 세트를 하는 거도 고역이었는데, 두 세트부터는 거의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끝까지 하는데에 의의를 두던 나에게 누군가 파이팅, 하고 외쳤다. 등수를 따지자면 내가 꼴찌, 그 사람은 1등이었다. 1등은 금세 나를 앞질러 갔고 나도 파이팅! 하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뭔가 가슴이 찡했다.




마지막 세트 종료 15초 정도를 남기고, 나는 울면서 뛰었다. 사실 그 정도에서 그만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텐데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못하면 노력이라도 해야지. 뛰는 내내 괜히 뛰었다고 후회했다. 너무 힘들어서 오는 길은 터덜터덜 걷고 있었는데 잘 보니 입구에서 누군가 앉아있었다.


"얼마 안 남았다. 파이팅!"

"마지막까지 파이팅!"


크로스핏을 한지 이제 두 달이 다되어가는 때.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체육관 앞쪽에 줄줄이 앉아서 날 응원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응원이 쏟아지는 걸 보고 죽어라 달렸다. 그 사람들은 박수도 치고 환호도 했다. 크로스핏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걷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사람들과의 마음의 거리가 한 뼘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월요일에 누군가 커피를 사 왔다. 아침에 헐레벌떡 뛰어들어가니 커피 좀 드세요, 하고 커피를 권해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써서 한 입도 못 먹는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그랬겠는데 직접 권해주는 호의를 바로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감사하다며 커피 한 잔을 받았다.



크로스핏에서 신기한 점이 있다면 다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는 점이다. 전문적으로 몸을 만드는 사람 말고는 다들 운동 중에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나는 이온음료나 물을 마실 줄 알았는데 대부분 커피를 마신다. 바로 옆에 테이크아웃 전문점이 있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원래 커피가 운동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커피는 싫어한다.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싫다. 맛도 없고 텁텁하고, 남들은 잠이 깬다는데 나한테 카페인은 무력하기만 하다. 마시든 안 마시든 잠은 항상 잘 온다. 그러니 사약을 내 돈 주고 먹을 필요는 없었다. 운동을 하는 동안은 물을 열심히 마셨지만 나오고서는 커피를 바로 마셨다. 맛은 없지만 시원했다.


매번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다녔지만 엄마 생일 선물도 살 겸, 커피도 마실 겸 걸어서 갔다. 내가 마시는 음료에는 항상 달달함이 들어있어서 이렇게 쓰기만 한 건 처음이었다. 차가운 얼음에 담긴 씁쓸한 음료를 마시고 있으니 묘하게 적응되는 것 같기도 했다. 달지 않은 시원함은 나쁘지 않았다. 5월은 바람도 상쾌하고, 그늘은 시원하다. 시원한 음료까지 입 안에 가득하니 걷는 게 힘들지 않았다. 아메리카노를 좋아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제는 누가 준다면 웃으며 마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크로스핏을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힘들어서 가기 싫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버피를 10번씩 7세트를 했을 때였나, 그때는 바닥에 누워서 처음으로 나 이걸 왜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든 적은 있었다. 누군가 크로스핏이 왜 좋냐고 물으면 점점 발전하는 내가 좋고, 운동이 끝나고 난 뒤에 쾌감이 좋았다. 운동 끝나고 가 좋아서 운동을 하다니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그러면서도 계속 버피를 했다.




크로스핏은 오랫동안 한 사람들이 많고 서로 친해서 처음에는 외로웠다. 그리고 누군가 못하는 날 비웃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됐었다. 하지만 사람들과는 아주 조금씩은 친해지고 있었고 지금의 거리도 난 좋다. 운동을 할 때면 다들 자기 운동만으로도 벅차서 남에게 관심이 없다. 운동 시작한 지 2, 3분만 지나도 체육관에는 신음소리 나 헉헉 거리는 소리가 가득해질 정도다. 그저께도, 누군가 마지막까지 운동을 하는 걸 보고 다들 함성을 지르며 응원했다. 박수도 치고 소리도 지른다. 누군가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면 아무리 힘든 운동도 끝까지 해낼 수 있게 된다.



나의 지정석의 시야. 맨 앞 구석에 앉아있다.


운동을 하면 잡념이 없어지고 몸이 시원해진다. 준비운동도 힘들고 스트레칭도 힘들고, 와드는 더 힘들다. 좋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크로스핏이 좋다. 할 때는 앓는 소리만 내지만 재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운동 후에 마시는 아메리카노가 얼마나 시원한지 안다. 쓰고 맛없는 아메리카노. 그럼에도 응원과 호의가 담겨 있다. 아마 아메리카노를 좋아하게 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지만 좋아할 계기는 확실하게 생겼다. 적어도 아메리카노를 보면 예전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만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크로스핏을 그만두더라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때가 오더라도 커피 한 잔에 그때 건네받은 호의와 응원을 떠올릴 수 있게 되겠지. 이 여름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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