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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May 01. 2022

닭칼국수

가을이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닭칼국수는 안 좋아한다. 학교에서 급식으로 나올 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닭은 닭이고 칼국수는 칼국수고. 삼계탕은 좋아했지만 그 안에 국물을 퍼먹을 정도는 아니었고 애초에 하얀 국물의 음식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는 끌리지 않는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아서 어른들의 혈압을 높이는데 일조했는데 그래도 지금은 사회성이라는 게 생겨서 웬만해서는 잘 먹는다. 예전에 내가 생각한 닭칼국수는 느끼하고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싸늘한 가을밤이 떠오른다.











대학생활이 만족스러운 이유에는 동기들에게 90%의 지분이 있다. 어딜 내놔도 자랑스러운 동기들이다. 서로가 자랑스러운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동기부여가 된다. 쟤는 진짜 열심히 산다의 '쟤'를 번갈아가며 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노력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기들을 알고 난 이후의 나의 삶도 언제나 동기들의 영향을 받았다. 어느 방면에서든 앞서 가든 이들이 있었고 그런 그들 때문에 상실감과 질투, 박탈감도 느꼈지만 그걸 계기로 나는 더 성장하게 된다. 다른 학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우리 학교에 온 게 다행이고 이런 동기들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요즘에는 취직하려면 대외활동-인턴-정규직 루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일찌감치 그 루트를 깨달았기 때문에 수 없는 대외활동 지원서를 쓰고, 활동에 참여해왔고 3학년이 되고 나니 취업에 대한 압박이 강하게 느껴졌다. 스물둘, 스물셋은 인턴에 뽑히지도 않고 인턴을 하기에 어린 나이다 뭐다 하더니 스물두 살인 동기가 우리 중에서 제일 먼저 인턴을 시작했다. 부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친구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고 있었으니 부럽고 질투 나고. 아무튼 자극이 됐다. 그 이후에 나도 인턴을 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인턴이 된 친구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그 친구는 여태 회사생활에 대해 공유할 사람이 없다며 뛸 듯이 기뻐했다. 원래부터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우리의 연락 빈도는 자연스럽게 늘어갔다. 대학생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라 말하지 못했고 인턴을 구하는 친구들도 많았기 때문에 배부른 투정처럼 느껴질까 봐 말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기에 출퇴근길에 그 친구와 연락을 하는 게 하루의 낙이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동기 한 명과 연락을 했다. 지나가듯 보냈던 인스타 DM으로 시작해서 결국 9월의 어느 주말에 우리 셋이 만나게 되었다. 셋이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에 공백은 없었다. 동기는 우연히 그날 합격 통보를 받았고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인턴 친구가 생겼다. 그날 우리는 새로운 단톡방을 팠다. 단톡방 이름은 오늘도 출근. 이 단톡방에서 내가 회사를 다니는 2개월 반 동안 매일같이 연락이 오갔다. 그전까지는 친하긴 했지만 개인적인 연락은 거의 하지 않던 사이였다.




<오늘도 출근>에서는 엄청난 얘기가 오가지 않았다. 출근길에 아침 인사를 하고 점심을 뭘 먹었는지, 오늘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금 잠이 온다던가, 배가 고프다던가, 순간순간의 일상들을 이야기했다. 이야기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조금은 즐거워지는 것들을 나눴다. 작은 행복들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작은 행복들이 마음의 온도를 올릴 수 있다. 매번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화면만 보며 똑같은 일을 하는 하루하루에 간간이 쏟아지는 친구들과의 연락은 날 기쁘게 했다.



부모님에게 매일 징징거리면 걱정할까 봐, 대학생 친구들은 이해할 수 없어서, 담아둔 고민들을 다 털어버릴 수 있었다. 우리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둬두고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다. 물론 나의 상황은 그 친구들과 달랐다. 재택근무를 하는 친구들과 다르게 나는 매일 출근을 해야 했고, 집에 가면 가족이 있고 일상이 있는 친구들과 다르게 나는 집에 가도 아무도 없는 반쪽자리 집을 마주해야 했다. 집에 가면 푹 쉴 수 있는 친구들과 짬을 내서 집안일을 해야 하는 나는 달랐다.


그래서 나에게 작은 우울이 찾아온 건 안다. 그런 간극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집에 가면 가족들이 있고, 힘든 일도 얘기하고 같이 밥을 나눠먹는........... 나에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상이 비일상이어서 날 힘들게 했다.





하지만 그 우울의 무게를 덜어준 것 또한 친구들이다. 퇴근하고는 칼처럼 연락을 끊어버렸지만 가끔씩 자기 직전까지도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게 내가 느낄 수 있는 온기였다. 지금을 잊게 만드는 주문. 내가 잘못한 일을 얘기해도 다독여줄 수 있는 사람들. 우리는 딱 두 번을 만났다. 주말밖에 없고, 토요일에는 동아리를 해야 하는 직장인들이 낸 최고의 사치였다.



한 번은 부추 삼겹살을 먹었다. 술도 조금 먹고, 사진도 찍고 카페도 갔다. 그 순간들이 나는 너무 반갑고 즐거웠다. 서로의 실수를 나누고 서로의 회사에 대해 얘기한다. 월급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대학생이었는데 어느 순간 직장인이 된 게 이상하고 신기했다. 과제나 교수님에 대한 게 오로지 우리의 대화 주제였는데 이제 학교가 시험기간인지, 과제가 많은 기간인지 같은 건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거리감마저도 혼자가 아니었기에 버텨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나의 퇴사 전날이었다. 퇴사 당일은 시간이 안된다고 누군가 이야기했기에 퇴사 전날에 만나기로 했다. 우리가 약속을 잡은 건 서울역 부근의 닭칼국수집이었다. 친구가 잘 아는 맛집이라고 했다. 퇴사 직전까지 일이 많았다. 아무래도 퇴사 직전이니 새로운 일은 주어지지 않았고 인수인계 파일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전에 작성된 초안이 없어서 아예 새로 써야만 했다. 퇴사 직전 일주일 동안 인수인계 파일만 만들었고 사수가 피드백을 주면 그걸 계속 수정해나가며 파일을 다듬었다. 출근도 지각해버렸고 업무도 다 끝내지 못해서 차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일이 끝나면 가려고 했는데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한 시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정확하게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버스정류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가을밤은 쌀쌀했다. 환승을 한 번 했던가. 버스에서 버스로 갈아탔던 것 같다. 그때는 이미 집을 뺀 이후여서 건대 부근의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내가 살던 곳으로 가는 버스를 오랜만에 탔다. 고작 4일 만이었는데도 몇 년 만에 온 것 같았다. 버스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고요했다. 창문을 살짝 열고 차가운 가을바람을 맞았다. 넘실, 넘실. 부드럽게 흔들리는 버스에 앉아있었다. 그립고 서러운 기분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유난히 감성적으로 변하는 날이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밤. 기사님은 호의를 베풀어 앞문과 가까운 나에게 앞문으로 내릴 걸 권유했다. 기계적으로 내뱉는 '감사합니다'에도 힘이 실렸다. 목소리만으로 기분을 오로지 표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반도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웠다. 길을 조금 헤매다가 닭칼국수 집을 발견했다.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보였다. 늦었는데 얼른 먹으라며 한 국자를 떠서 건넸다. 하얀 국물은 좋아하지도 않고 닭 육수는 더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유난히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감동을 받은 건 아니었는데도 자꾸 손이 갔다.



원래 만두를 넣으면 국물에서 만두 맛이 많이 나서 안 좋아하는데 이건 또 아니었다. 국물은 계속 먹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담백하고 안에 들어있는 닭은 촉촉했다. 친구가 괜히 맛집이라고 추천해준 게 아니었다. 앞으로 먹게 될 닭칼국수도 이런 맛이라면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오래 하면 오히려 입맛이 떨어져서 얼마 먹지도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릇을 싹싹 비웠다.


밥을 먹으니 우울함은 가시고 그리움과 애틋함만 남았다. 냄비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한 달 동안의 근황을 공유했다. 친구들은 날 위로해주며 축하해줬다. 우리는 가을밤을 가로지르며 서울역으로 향했다. 별이 보일 수 있을 정도로 깜깜한 밤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팔짱을 끼고 바람을 맞으며 사람 없는 길을 걸었다. 이거 청춘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다며 깔깔 웃었다. 별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고등학생처럼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분위기에 취한 게 틀림없었다. 울긋불긋한 낙엽이 듬성듬성 시야에 들어왔다. 가을이었다.



원래는 케이크를 사서 파티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며 친구들은 도너츠에서 도넛을 사 왔다. 노래도 불러주고 그림으로 만들어진 초를 흔들어줬다. 나는 물질 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들의 마음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다들 피곤할 텐데 이렇게 축하해주러 한달음에 달려온 게 기뻤다. 누군가가 나를 위하는 마음은 언제나 과분하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지만 그 뒤로는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여름에, 다시 한번 셋이서 만나고 싶다.









슬픔과 괴로움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을 이제야 알았다. 모든 슬픔이 그렇게 사라질 순 없겠지만 누군가 들어주면 가벼워지는 것들이 있다. 나에게는 그걸 들어줄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학 동기와는 진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애들도 있었고, 나 역시 코로나로 인해 친구들과 더 많이 교류하지 못해서 우리 사이에 벽이 존재한다고 줄곧 믿어왔다.





친구가 벽을 만들었을 수는 있지만 나 역시 벽을 만들게 된다면 벽은 더 두꺼워질 뿐이다. 여태 내가 너무 두꺼운 벽을 만들어놨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을 만들었으니 건너편에 있는 상대방이 희미해진 건 당연함에도 희미해졌다고 성질을 부렸다. 나의 벽은 이제는 더 얇아질 것이다. 없앨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어른이 되면 힘든 일들이 더 많아질 거고, 직급이 높아질수록 부담감은 커질 것이다. 그래도 나는 같은 자리에 있을 친구들과 이야기들을 끝없이 나누고 싶다. 좋은 건 두배로, 나쁜 건 반으로. 외로울 때면 쌀쌀했던 그 가을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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