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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Sep 25. 2022

사람이 변할 수 있나요?

나의 영원한 전환점을 생각하며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이 문장에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인 이들은 굉장히 많은 편인데-범죄자를 제외하고는-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그걸 뒷받침해줄 상황이 있고 꾸준한 노력이 있다면 가능하다. 누군가에게 마구 상처를 주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범죄자들을 옹호하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니다. 요새 들어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너무나 선명한 말이라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 출처와 당시에는 전혀 와닿지 않는 바람에 잊혀버린 출처의 말들이 있다. 네이버 웹툰 <유일무이 로맨스> 속의 계속하면 다음이 온다고, 그러면 또 다음에 하면 된다는 말과 살아있으니까 포기하지 말고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는 말. 공통점이 있다. "계속"이라는 말이 들어간다는 점. 


첫 번째 말은 나에게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다. 읽는 당시에도, 그 후로도 쭉 되새기고 살아가는 말이다. 노력은 참 비효율적인 일이다. 노력이라는 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신밖에 모른다. 주위 사람들이 알아주는 노력은 눈에 띄는 노력일 뿐 더 대단한 노력은 아니다. 어떤 노력을 어떻게 해서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는지는 자신밖에 모른다. 그래서 더 외로운 일이다. 노력이라는 것에 회의감이 들어서 일탈 청소년처럼 노력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고, 바뀌기는 하는 거냐며 소리 지르고 싶은 날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계속이라는 말은, 언젠가라는 추상적인 말들은, 아직까지 가라앉지 않고 두둥실 떠있기 때문에 노력하게 된다. 돌고 돌아 노력한다. 수많은 다음을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두 번째 말은 참 먼 말이었다. 말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듣기만 해도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려 자기 자리를 만들어버리는 말과 아무리 읽어도 와닿지 않아 버리게 되는 말과 읽을 때마다 맛이 나는 말과 읽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오랫동안 기억되는 말.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뻔하고 진부한 말이다. 분명 만화에서 읽은 것 같은데 맥락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을 하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말은 어느 날 갑자기 와닿았다. 우리에게는 다음이 있다. 어떤 상황 하나에만 매몰되어 살아갈 수 없다. 내일은 오고 그다음 날은 오고 계속 나이를 먹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포기하면 안 된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기회가 있다. 바뀔 수 있는, 바꿀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찾아온다. 인생은 계속과 다음의 연속이다. 기회를 잡아야만 한다. 내가 아무리 쓰레기 같은 사람이더라도 살아있는 한 노력할 기회가 있다. 내 성격도 관계도 인생도 바꿀 수 있다. 살아있으니까. 그러니까 살아있는 동안에 뭐든 쉽게 포기해서는 안된다. 기회가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얘기하다 느끼지만 분명 만화 속의 누군가가 죽었던 게 틀림없다-




사람들은 자꾸 구제불능이라고, 저런 애는 평생이 걸려도 못 바뀔 거라며 장담할 수 없는 말들을 함부로 한다. 인생이 얼마나 긴지 알면서도 그런 말을 쉽게 내뱉는다. 누구든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다. 더 행복한 삶을 잡을 수 있다. 얼마 전 수업 중 선생님이 왜 인생을 사냐고,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얼떨결에 행복을 찾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말하고 나니 확실해졌다. 나는 행복해질 것이고 그걸 위해 뭐든 노력할 수 있다.









나는 정확하게 나를 개명 전과 후의 나로 나누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이 훨씬 마음에 드는 쪽이다. 타인에게 내 삶이 쏠려있지 않았다. 그 전의 나는 타인에게 예민하고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보고 나보다는 남이 우선이었지만 지금은 나에게 집중되어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학창 시절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성숙하다. 재수를 하면서도 나와 얘기할 시간이 많았는데 대학에 들어가서도 많아졌다. 나에게 귀 기울이는 게 즐겁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내가 변했다고 이야기하고 대학교 친구들은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남을 배려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가 이 대학에 온 게, 이 학과에 온 게, 감격스러울 정도로 기쁘다. 다른 건 몰라도 인복은 있다고, 항상 생각한다. 이러려고 10대에는 인복이 지지리도 없었나 싶기도 하고.


절대 못 찾았을 것만 같았던 내 장점도 찾았다. 이건 다른 사람들이 몇 번이나 말해줘서 알게 됐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잘 찾는다는 것. 칭찬 요정 같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것 중 좋은 점은 대체로 바로 말한다. 좀 비약적이지만 내 인생에서 칭찬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는데 그 칭찬들이 유난히 오랫동안 날 지탱해줬다. 그래서 남들에게는 습관적으로 좋은 점들을 이야기해주게 됐다. 그게 그 사람에게 힘이 됐으면 싶은 것까지는 아니지만 원동력 중 일부가 되었으면 싶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친해지는 여러 번의 과정이 날 즐겁게 했다. 고등학교 때는 같은 교실에 앉아서 같은 수업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는데 대학에서는 어려운 게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말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크로스핏을 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더 쉬워졌다.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동지애가 있다. 어색하게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것보다 운동 한 번 같이 하는 게 사람 사이의 거리를 줄인다. 이걸 같이 한다는, 같이 해낸다는 마음이 거리감을 없애버린다. 서로의 이름과 얼굴과 운동능력밖에 모르지만 띠동갑인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친구에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실감했다. 

교환학생을 가서 친구를 못 사귈까 봐 걱정하는 나에게 그 누구도 공감해주지 않았다. 네 성격에 친구를 못 사귈 리가 없다는 게 동일한 대답이었다. 사교성이 없었던 나로서는 고마우면서도 뿌듯했던 말이었다.




운동을 평생 싫어할 줄 알았다. 못하는 나에게 창피를 주는 게, 날 주목하는 게 싫었다. 하지만 크로스핏을 좋아하게 됐다. 처음으로 창원에 직장이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원히 살찌지 않는 몸과 영원히 골격근량 25 중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후자다. 취향을 존중해서 근육이 있는 여자도 멋있다고 말하지 않고 진심으로 멋있다고 느끼게 됐다. 요즘은 근육량을 들을 때마다 저 사람은 스트릭 풀업을 할 수 있는지, 클린 무게는 얼마나 되는지부터 생각한다. 이제 절대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공부를 좋아하긴 했다. 그래도 수능이 끝나면 영원히 안 할 줄 알았는데 엄마 아빠의 반대 속에서도 중국어 공부를 하게 됐다. 중국어라는 단어는 언제나 설렌다. 어렵지만 잘하고 싶다. 이제 전화 중국어를 할 때도 어렵고 답답하기보다는 즐겁다. 왜 그렇게 재밌는지 모르겠는데 재밌다. 머리가 아프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중국어 단어를 외우곤 한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글은, 이제 안 쓸 줄 알았다. 쓰는 재미를 포기하지 못해서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이어지지 못하는 짧은 글들을 계속 썼다. 작가라는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소설 한 편도 완성해본 적이 없는데 내 주제에 무슨.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글은 꾸준히 썼다. 쓰고 또 쓰고. 누가 쓰라고 한 건 아닌데 두꺼운 노트 한 권을 다 채울 만큼 쓰기는 했다. 펜팔을 하던 친구가 책을 선물해줬다. 한가한 방학 때였다. 4년 정도 만에 읽은 진짜 책이었다. 오랜만에 읽고 나니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썼다. 그렇게 글을 다시 쓰게 됐다. 혼자 소설을 쓰다가 브런치라는 사이트를 알게 됐고 두 달이라는 고민 끝에 신청했다. 당연히 떨어질 수 있지만 떨어진다면 두 번 다시 글을 못 쓸 것 같았다. 꼼꼼하게 준비한 덕에 브런치에서도 꾸준히 글을 쓰게 됐다.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소설도 즐겁고 내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에세이도 즐겁다.




한 번 싫어한 사람은 계속 싫어했다. 이건 정말 바뀔 수 없는 본성이라도 되는지 아직도 불편함을 인지했던 사람에 대한 껄끄러움은 남아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방법을 만들었다. 불편해하지 않기로 했다. 불편함을 곱씹지 말고 되새기지 말고 마음에 담지 말고 최대한 빨리 털어버렸다. 좋은 행동을 하면 그걸 부풀려서 덮어버렸다. 예전에는 나에게 상처 주고 맞지 않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아 낙인을 찍고 그 사람의 행동과 말을 되새기는데 열중했는데 이제 그러지 않기로 했다. 털어버리는 쪽이 가볍다. 좋아하는 쪽이 즐겁다.




예전에는 엄마 아빠가 많이 미웠는데 지금은 미워할 수가 없다. 혈연은 끊을 수 없다는 말을 싫어했지만 이제는 그 말을 이해한다. 내가 사람을 너무 쉽게 미워했다는 걸 반성하고 있다. 내 기분만이 아니라 엄마 아빠의 기분도 생각한다. 멀게만 느껴졌던 할머니 할아버지도 요새 들어 가깝게 느껴진다. 터무니없는 사랑들이 진짜 사랑으로 다가온다. 가족을 사랑하게 됐다.








이렇게 수많은 전환들을 쌓아 지금의 내가 좋아졌다. 내가 원래 긍정적인 사람이라 그럴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내가 좋아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 예전에는 행복하냐고 물으면 이 정도면, 이라는 전제가 붙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행복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누군가가 많이 부러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시간낭비다. 아무리 그 사람을 부러워해도 그 사람의 인생은 내 것이 될 수 없고 나는 그 사람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데. 자기 위로라고 할 수는 있지만 나는 내 인생을 누구와 바꾸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을 삶을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내가 아니다. 지금 내 삶에 만족하고 있다. 



내가 바뀌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정말. 나는 이제 나한테서도 장점을 보기로 했다. 나쁜 점 말고 좋은 점만. 나는 의지가 강하다.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이다. 나쁜 일들은 빠르게 흐르는 시간보다 더 빨리 잊는다. 노력하는 나 자신에게 취할 수 있어서 노력할 수 있다. 착하지는 않지만 착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내가 가진 걸 아낌없이 나눌 수 있다. 질투와 시기와 열등감은 내 노력으로 승화할 수 있다. 나쁜 생각이 들면 내 좋은 점만을 머릿속에서 끝없이 나열한다. 퀴즈가 아니니까 같은 점이 두 번 나와도 관계없다. 그러면 또 나는 내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다음이 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음을 잡을 수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 변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적어도 악담은 하지 말자. 실패하더라도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지 말자. 그 실패도 완전한 실패는 아니고 그 사람 안에서 깨달은 것이 또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도 합리화할 생각은 없다.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나와 똑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더 나은 삶을 향해 걸어 나가길 바랄 뿐이다. 앞으로도 남은 이들은 살아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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