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 계속된 일이나 현상의 맨 끝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사람을 매일 마주할 일이 줄었고 모두가 성숙해졌기에 예전만큼 부딪힐 일도 줄었다. 관계의 피로도가 다른 쪽으로 발전한 건 확실했다. 학교 다닐 때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간관계를 고민하게 되었으니까. 특히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만나는 횟수가 줄어드니 자연히 갈등의 횟수도 줄었다. 이제 그 시대를 회복하면서 가끔 관계에 대한 고민이나 걱정이 몰려들 때가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이상 당연히 발생하는 일이고 당연한 감정소모가 뒤따른다.
다만 그럴 때면, 나에게 종말 같은 사람이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면 뭐든 옅어지길 마련이지만 사람이 난 자리는 쉽게 메워지지는 않는다. 옅어지는 것과 비어있는 것은 다르다. 처음만큼 강력한 건 없었고 그 종말은 나에게 처음이었고. 떠올리지 않지만 정말 아주 가끔씩, 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종말-그 사람을 종말이라고 부르자면 그렇다-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미성숙한 만큼 종말도 미성숙했고 둘이 성숙해지고 나서 돌이켜보니 종말의 쪽이 조금 더 미성숙했다. 그걸 나도 알았고 주변의 모두도 알았지만 종말만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관계의 종말을 선포했고 그대로 종말 되었다. 종말은 가끔 내 생각을 할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종말은 자주 꿈에 나온다. 내가 종말을 떠올린 것도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불규칙적으로 내 꿈에 나타난다. 내용은 언제나 같다. 우리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 종말과 나는 싸운 상태 거나 어색한 상태 거나 아직까지 친구인 상태다. 정말 재밌는 건 종말은 눈앞에 있지만 꿈속에서 나는 단 한 번도 종말을 선택하지 않았다. 종말은 사과했고 난 여전히 종말을 좋아하고 있었다. 꿈에서의 우리는 싸우지 않았다.
깨고 나면 당황스럽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는데 나는 종말과 친구로 남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다. 나는 내 최선을 믿어 의심치 않고 5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다. 종말과 지낸 시간보다 연락하지 않은 시간이 더 길다는 걸 알면서도. 떨어진 시간의 밀도는 함께 지낸 시간의 밀도보다 낮은 게 틀림없다.
지금도 종말과 연락하고 싶다거나 종말이 궁금하다거나 그러지는 않다. 우리는 너무 어색해졌고 다시 만난다고 해도 그때의 우리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면 어김없이 종말이 생각난다. 난 왜 종말과 싸우는 게 두렵지 않았을까. 왜 종말이 날 싫어할까 봐, 미워할까 봐, 우리가 돌이킬 수 없게 될까 봐 두렵지 않았을까. 관계가 두려운 지금의 나는 알 수가 없다.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아쉬움이나 미련이 없는 게 어렵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난 종말과의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다. 배 안 깊숙한 곳에서 이따금 차올라서 속을 불편하게 하고야 마는 이유를 알고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함은 더 불규칙적으로 찾아오고 나는 이유 모를 답답함을 헤매야 한다. 그걸, 그만두고 싶다.
내 인생에서 종말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애정을 줬고 드러냈고 내 모든 바닥을 보인 사람. 보여줘야 할 부분과 그렇지 않을 부분을 구분하지 못하고 서로의 마음을 드러내서 상처받았던 때. 진심이 아닌 최악이 섞여있었다는 걸 지금은 안다. 지금은, 지금은 안다.
종말과의 끝을 생각한 건 종말도 나와의 끝을 생각했다는 순간이었다. 그걸 듣고 간신히 붙잡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심하게 싸워서 일주일 내내 마주쳐도 인사를 안 했었는데. 어떻게 화해했는지는 기억나지도 않는다. 내가 화해한 이유는, 종말과 끝내고 싶지 않으면서도 내가 끝내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분명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런 방식은 아니었으면 했다. 결국은 내 쪽이 더 최악이었지만.
그때야 재수라는 핑계로 연락을 끊었지만 재수를 하지 않았더라도 종말을 계속 만났을까? 단 한 번도 같은 대학에 가자는 말을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왜 그랬을까. 같은 반도, 같은 동아리도 되고 싶었고 문과든 이과든 같은 곳으로 가고 싶었는데 왜 대학만은 그랬을까. 나는 멀리 달아나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지나치게 관계에 대해 잘 안다는 얘기를 듣는다. 아마 종말과 바닥까지 보았기 때문이겠지. 발이 푹 빠져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을 4년이나 해왔는데 모르는 게 이상할지도 모른다. 지긋지긋함과 약간의 해방을 행복으로 느끼면서. 종말과 내가 관계를 끝냈을 때 모두가 놀랐었다. 왜 너희가? 어쩌다가? 아무것도 정의되지 못한 관계. 지금 생각하면 아마 종말도, 이 관계를 끝내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이상해져서 몰랐지만 종말도 이상했었다. 천천히 상황을 돌이켜보다가 그걸 방금 알았다. 이제 마지막이니까 둘 다 참았던 거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는 나의 말이었다. 그리고 난 단 한 번도 먼저 연락한 적 없다. 그러니까 이미 우린 끝난 관계였고 종말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몇 번이나. 몇 달에 걸쳐서. 그리고 그 손을 뿌리친 건 나였고. 그럼 난.................
딱 한 번 더 종말을 만나고 싶다. 내가 널 종말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면 넌 어떤 얼굴을 할까.
완전한 종말을 원한다. 아쉬움도 미련도 없는, 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