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열음 Dec 09. 2020

돼지국밥

마음도, 속도 든든하게 채워주는 한 끼

요즘 따라 입맛이 없다. 막상 끌리는 걸 찾으면 얼마든지 먹어치우지만, 찾지 못하면 굳이 먹지 않는다. 내 식욕은 주인을 닮은 건지 언제나 양극단을 향해 달린다. 어떨 때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일주일에 3kg가 찌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아서 3kg가 빠지기도 한다. 내 몸무게가 유독 유동적인 것도 그 때문이다.





오늘은 내일 있을 면접 때문에 화상으로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반가워서 중간중간 잡담을 하다 보니 시간이 두 시간이나 흐른 바람에 회의가 끝났을 때는 7시가 넘어 있었다. 입맛이 없던 중에 생각나는 게 뜨근한 돼지국밥이었다. 그래서 내일 휴가인 아빠를 졸라서 집 근처에 유명한 돼지국밥 집에 가서 포장해왔다.



그냥 집에서 대충 먹으라는 아빠에게 죽는소리를 해가면서-딸이 소중하다면서 딸 입에 들어가는 돼지국밥 한 숟갈이 아까워서 그러는 거야? 어떻게 사람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가 있어. 아픈 딸이 유일하게 먹고 싶은 게 돼지국밥이라는데 내일 휴가면서 지금 나갔다 오는 게 그렇게 힘들어? 하고 쏘아붙였다-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조용히 물었다.



"돼지국밥 포장되나요?"

"네."

"그럼........ 고기 빼고 1인분만 포장해주세요."



주방에 계신 아주머니는 세 번을 더 물었다. 고기를 빼 달라고요? 그냥? 고기 없이? 그럼 육수만 달라는 얘기예요?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는 별 특이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이걸 주방에 전달하는 과정도 비슷했다. 조리를 담당하는 아저씨는 주문을 받은 아주머니에게 세 번을 물었다. 국밥에서 고기를 빼 달라고? 진짜? 육수만 포장해줘? 당황하신 모양이었다.




괜히 머쓱한 기분에 휴대폰만 이것저것 만지작거렸다. 고기만 빼고 부추랑 다대기 같은 건 다 넣고, 고기도 뺐는데 육수 좀 더 넣어요.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조금 웃음이 났다. 분명 기억에 남을 이상한 손님이겠지.






집에 와서 뜨끈한 국밥으로 속을 채웠다. 피로가 다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입맛이 묘하게 까다로운 내가 국밥을 먹게 된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가끔 사람들은 이상한 편견에 휩싸인다. 여자애들은 국밥을 싫어한다, 여자애들은 밥을 적게 먹는다. 나와야 할 곳에서는 성별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나오지 말아야 할 곳에서는 성별이 등장한다. 우리 학교 앞에 국밥 집이 없고 떡볶이, 마카롱 집만 가득한 것도 그런 편견에서 비롯된 게 틀림없다.





누가 저런 편견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만나게 된다면 얼굴에 국밥이라도 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어쨌든, 급식이 맛없기로 단지 내는 물론 지역에서도 유명했던 우리 고등학교의 최고 인기 메뉴는 돼지 국밥이었다. 국밥이 나오는 날이면 두 번씩 받아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새우젓과 다대기를 넣어 간을 하고, 부추를 썰어 넣어 식감을 더한 돼지국밥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때까지만 해도 돼지고기도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난 영 불안한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었지만 잠 깐 뿐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들의 최애 메뉴는 돼지국밥이 되었다. 돼지국밥을 하는 날이면 급식 줄도 길었고 매점 줄도 길었다. 이 훌륭한 식사의 최대 단점은 먹고 난 후가 텁텁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배를 든든하게 채운 아이들은 매점으로 가서 시원한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을 했다. 평소에는 매점에 잘 가지 않는 나도 돼지국밥을 먹은 날이면 꼭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나는 사실 부추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편식을 하는 내가 부추를 좋아하는 것도 이상하다-국밥 속 고기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추는 굳이 받지 않았고 고기는 먹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다들 내 옆에 앉아서 나의 고기를 받아가고 싶어 했다. 그들에게 돼지국밥은 아마도 고기가 있기에 완성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의 경우에는 전혀 아니지만.





미역국처럼 건더기는 다 빼고 그 뽀얀 국물만을 좋아한다. 저번에도 다른 곳에서 국밥을 포장해왔다가-그때는 고기를 먹어줄 언니가 있었다-고기가 조금 남아서 버린 적이 있다. 우리 집에서 환영받지도 못하는 고기라면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먹지도 않을 텐데. 먹더라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데. 분명 좋아하는 사람이 먹는 쪽이 더 나을 것이다.




오늘도 예전처럼 국밥 한 그릇을 먹고, 입가심으로 초코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었다. 아직까지도 입이 텁텁하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텁텁함이 마냥 싫지는 않다. 속을 달래주는 뜨끈한 국밥. 이름만 들어도 든든한 기분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양송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