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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Dec 09. 2020

돼지국밥

마음도, 속도 든든하게 채워주는 한 끼

요즘 따라 입맛이 없다. 막상 끌리는 걸 찾으면 얼마든지 먹어치우지만, 찾지 못하면 굳이 먹지 않는다. 내 식욕은 주인을 닮은 건지 언제나 양극단을 향해 달린다. 어떨 때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일주일에 3kg가 찌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아서 3kg가 빠지기도 한다. 내 몸무게가 유독 유동적인 것도 그 때문이다.





오늘은 내일 있을 면접 때문에 화상으로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반가워서 중간중간 잡담을 하다 보니 시간이 두 시간이나 흐른 바람에 회의가 끝났을 때는 7시가 넘어 있었다. 입맛이 없던 중에 생각나는 게 뜨근한 돼지국밥이었다. 그래서 내일 휴가인 아빠를 졸라서 집 근처에 유명한 돼지국밥 집에 가서 포장해왔다.



그냥 집에서 대충 먹으라는 아빠에게 죽는소리를 해가면서-딸이 소중하다면서 딸 입에 들어가는 돼지국밥 한 숟갈이 아까워서 그러는 거야? 어떻게 사람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가 있어. 아픈 딸이 유일하게 먹고 싶은 게 돼지국밥이라는데 내일 휴가면서 지금 나갔다 오는 게 그렇게 힘들어? 하고 쏘아붙였다-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조용히 물었다.



"돼지국밥 포장되나요?"

"네."

"그럼........ 고기 빼고 1인분만 포장해주세요."



주방에 계신 아주머니는 세 번을 더 물었다. 고기를 빼 달라고요? 그냥? 고기 없이? 그럼 육수만 달라는 얘기예요?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는 별 특이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이걸 주방에 전달하는 과정도 비슷했다. 조리를 담당하는 아저씨는 주문을 받은 아주머니에게 세 번을 물었다. 국밥에서 고기를 빼 달라고? 진짜? 육수만 포장해줘? 당황하신 모양이었다.




괜히 머쓱한 기분에 휴대폰만 이것저것 만지작거렸다. 고기만 빼고 부추랑 다대기 같은 건 다 넣고, 고기도 뺐는데 육수 좀 더 넣어요.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조금 웃음이 났다. 분명 기억에 남을 이상한 손님이겠지.






집에 와서 뜨끈한 국밥으로 속을 채웠다. 피로가 다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입맛이 묘하게 까다로운 내가 국밥을 먹게 된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가끔 사람들은 이상한 편견에 휩싸인다. 여자애들은 국밥을 싫어한다, 여자애들은 밥을 적게 먹는다. 나와야 할 곳에서는 성별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나오지 말아야 할 곳에서는 성별이 등장한다. 우리 학교 앞에 국밥 집이 없고 떡볶이, 마카롱 집만 가득한 것도 그런 편견에서 비롯된 게 틀림없다.





누가 저런 편견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만나게 된다면 얼굴에 국밥이라도 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어쨌든, 급식이 맛없기로 단지 내는 물론 지역에서도 유명했던 우리 고등학교의 최고 인기 메뉴는 돼지 국밥이었다. 국밥이 나오는 날이면 두 번씩 받아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새우젓과 다대기를 넣어 간을 하고, 부추를 썰어 넣어 식감을 더한 돼지국밥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때까지만 해도 돼지고기도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난 영 불안한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었지만 잠 깐 뿐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들의 최애 메뉴는 돼지국밥이 되었다. 돼지국밥을 하는 날이면 급식 줄도 길었고 매점 줄도 길었다. 이 훌륭한 식사의 최대 단점은 먹고 난 후가 텁텁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배를 든든하게 채운 아이들은 매점으로 가서 시원한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을 했다. 평소에는 매점에 잘 가지 않는 나도 돼지국밥을 먹은 날이면 꼭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나는 사실 부추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편식을 하는 내가 부추를 좋아하는 것도 이상하다-국밥 속 고기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추는 굳이 받지 않았고 고기는 먹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다들 내 옆에 앉아서 나의 고기를 받아가고 싶어 했다. 그들에게 돼지국밥은 아마도 고기가 있기에 완성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의 경우에는 전혀 아니지만.





미역국처럼 건더기는 다 빼고 그 뽀얀 국물만을 좋아한다. 저번에도 다른 곳에서 국밥을 포장해왔다가-그때는 고기를 먹어줄 언니가 있었다-고기가 조금 남아서 버린 적이 있다. 우리 집에서 환영받지도 못하는 고기라면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먹지도 않을 텐데. 먹더라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데. 분명 좋아하는 사람이 먹는 쪽이 더 나을 것이다.




오늘도 예전처럼 국밥 한 그릇을 먹고, 입가심으로 초코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었다. 아직까지도 입이 텁텁하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텁텁함이 마냥 싫지는 않다. 속을 달래주는 뜨끈한 국밥. 이름만 들어도 든든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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