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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Jan 17. 2021

샤브샤브

나마저도 잊었던 기억 속에서


얼마 전은 나의 생일이었다. 먹는 게 인생의 행복 중 하나이기 때문에 생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날이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순위전이 펼쳐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재작년에는 갈매기살이었고 작년에는 수제버거, 이번 생일에 간택된 음식은 바로 체인점의 샤브샤브였다.




샤부샤부가 맞는 표현이지만 샤브샤브의 글자 모양이 더 마음에 들어서 매번 샤브샤브라고 부른다. 샤브샤브는 내 최애 음식이었지만 사실 다시 먹게 된 건 몇 년 되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샤브샤브를 먹은 건 9살 무렵이었다.









부모님이 같은 직장 동료들과 만든 모임이 있었고 주로 만나거나 여행을 가는 것도 이 모임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이름 없이 '계모임'이라고 불렀다. 엄마 아빠가 부르는 계모임의 '계'가 무슨 뜻인지도 모를 때부터 쭉 만나왔다. 부모님들끼리는 나이 차가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같은 직장이다 보니 화제가 끊길 일이 없었다. 내 예상컨대 여행이나 모임을 더욱 자주 추진할 수 있게 된 계기는 우리들이었을 거다. 결혼은 다 다른 시기에 했지만 아이들의 나이가 다 비슷비슷했던 것이 더 많은 공통 화제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부모님들은 주로 '어른들끼리'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했기 때문에 우리는 알아서 친해졌다. 생존형이었다. 엄마 아빠한테 가도 알아서 놀라는 소리를 하니까 친해져야 했다. 모임을 할 때면 언제나 식당을 예약했는데 꽤 자주 갔던 곳이 샤브샤브 가게였다. 그곳은 단체 예약을 반겼고 초등학생 아이들이 좋아할법한 놀이터가 있었던, 꽤 선구적인 곳이었다.





처음에 엄마가 샤브샤브를 먹는 법을 가르쳐줬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빨간 국물이 팔팔 끓으면 고기를 물에서 마구 흔들어준다. 흔들수록 빨간 부분은 사라지고 보기 좋게 익어가는 모습이 군침이 돌았다. 불에 구운 고기는 물론 물에 빠진 고기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샤브샤브는 유독 맛있었다. 흔들면 익는다는 게 재밌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얼큰한 것과 매운 것을 좋아한 내 입에도 맛있는 육수였다. 고기를 먹고 나면 두꺼운 칼국수 면이 나왔고, 칼국수까지 먹고 나면 볶음밥을 만들 수 있었다.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게 게임 같았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한 번 먹고 나니 무슨 맛인지 기대가 돼서 어떤 단계든 즐거웠다. 고기를 먹을 때에는 맑은 국물에 색이 변하는 고기가 좋았다. 그리고 칼국수를 먹으면 뱃속이 뜨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볶음밥은 냄비에 잔뜩 눌어붙은 누룽지를 긁어먹는 게 신났다. 양념이 버무려진 누룽지는 고소했다. 아빠는 열심히 바닥까지 긁어줬다.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놀이터에 뛰어들어갔고, 오랜만에 보면 어색했지만 금세 친해졌다. 술래잡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놀고 있으면 지칠 때쯤 엄마 아빠가 밖에서 불렀다. 그러면 밥을 먹고 또 놀았다.



이렇게도 좋아했던 식당은 어느 순간 문을 닫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또 어른들의 사정일 게 분명했다.







그 뒤로도 샤브샤브가 먹고 싶어서 여러 식당들을 찾았지만 마음에 드는 식당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내가 샤브샤브를 싫어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내 기억이 어릴 적의 기억이라 미화된 게 아닌지.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연히 놀러 간 쇼핑센터에 그 샤브샤브 집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알게 되자마자 최대한 빨리 찾아가 밥을 먹었다.




그 빨간 국물과, 두툼한 칼국수 면을 마주하고 나자 내가 좋아했던 게 거짓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 미각은 어릴 때 형성되어서 그때 먹은 음식들은 평생을 기억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에 반신반의해왔지만 샤브샤브를 먹자마자 나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맛도, 소리도, 그 어떤 감각들도 희미해져서 기억만을 되풀이하길 마련이다. 그래서 영원히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먹자마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기억의 한 자락에서 끄집어낸 것 같은 맛. 나도 잊고 있었던,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었던 맛 자체. 추억과 기쁨이 온전히 그곳에 있었다. 다시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샤브샤브를 먹을 때마다 그때 앉았던 뜨끈한 바닥과 방석, 쉴 새 없이 뛰놀았던 놀이터, 바닥에 눌어붙었던 누룽지가 떠오른다. 고기를 흔들 때마다 엄마가 처음에 해준 말이 반복된다. 이제 그 식당은 그곳에 없고, 나는 아마 놀이터에 들어가면 제지당하겠지만 누룽지는 그대로다. 고기를 흔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부드럽게 흔들면 그때처럼 고기는 익는다. 옛 기억과 새로운 기억들이 한 겹씩, 두 겹씩, 덧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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