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있는 걸 의심할 것
두 달만에 서울에 왔다. 남아 있는 잔업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용감하게 발을 디뎠는데 생각보다 안전했다. 기차에는 두 자리에 한 명만 앉을 수 있게 해서 3시간의 시간도 불편하지 않았다. 창원과는 다르게 재난문자가 우수수 쏟아지고 있지만 그러려니 싶다. 오히려 서울이라는 걸 알려주는 척도가 된 것 같다.
냉동실에는 지난 12월에 내려온 언니가 남겨놓은 음식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도대체 저 안에 뭐가 있길래 또 자리가 없는 건지 궁금했다. 막상 열어보니 야채, 만두, 생선 등이 차 있었는데 그중 내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아마 유통기한이 한참 지났을 것 같은 치즈케이크였다. 편의점에서 파는 치즈케이크는 엄마가 인터넷으로 장을 봐서 보내줄 때면 가끔 추가되는 선물이었다. 언니는 냉동실이 마법 창고인 줄 아는 걸까. 치킨이든 떡볶이든 밥이든 뭐든 다 남으면 냉동실에 넣어버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먹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씹지 않아도 사르르 넘어가는 치즈케이크는 맛있다. 식감이 특이하다. 자를 때는 치즈를 자르는 것 같지만 먹을 때는 느끼하지 않게 굳은 크림을 먹는 것 같다.
엄마 아빠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노력하고 애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엄마 아빠의 상식이 허용되는 부분까지였다. 그래서 넓은 세상을 보라고 얘기했음에도 보이지 않는 견고한 벽은 있었다. 음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를 들면 족발이나 곱창 같은 음식처럼 우리나라의 소울푸드로 손꼽히는 것들.
난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처음으로 족발과 곱창을 먹어봤다. 엄마 아빠가 둘 다 싫어했기 때문에 애초에 우리에게는 접할 기회가 없었다. 족발은 냄새가 난다고 했고 내장류랑은 애초에 친하지가 않았다. 이 두 경우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특이하게 싫어하는 건 '치즈'였다. 딱 조선시대 같은 입맛이었다. 그 시절 사람들을 불러놓으면 할 법한 소리들을 했다.
엄마 아빠는 치즈는 느끼하다는 편견에서 아직까지 빠져나오지 못했다. 전 국민이 치즈에 열광할 때도 저게 뭐가 맛있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학교에서 치즈빵을 받아왔을 때도 엄마는 너 이거 안 좋아하잖아, 하고 말해곤 했는데 그때는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 편견과 분위기에 사로잡혀서 먹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느끼하니까 맛이 없을 거라고 결론 내린 것이다.
중학생 때는 연주회에 다녀왔다가 급식 시간을 놓쳐 다 같이 치즈빵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촉촉하고 담백했다. 먹어봐야 알 수 있다는 게 안타까웠지만 맛있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치즈를 탐내기 시작했다.
모차렐라 치즈를 사서 김치볶음밥 위에 올려먹고 라면에 치즈를 올려먹었다. 입이 심심할 때면 체다치즈를 찢어 먹었다. 지금도 그걸 보면 아빠는 경악하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이미 이게 맛있다는 걸 알았으니.
치즈케이크도 그렇게 먹게 되었다. 내 안의 음식의 호감도를 측정하는 기계가 있다면 치즈케이크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맛있는 거, 하고 인식하게 됐다. 언제나 치즈가 나에게 달콤함을 선물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치즈를 믿고 싶다.
이걸 계기로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가 보는 세상의 기준과 나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 기준에 대해서 평생 이해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내가 여태껏 엄마 아빠의 손 위에서 봐온 세상을 보는 관점이 틀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무조건 신뢰하는 게 아니라 의심이 필요하다. 경험할 수 있다면 손해보지 않는 선에서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 남이 알려주는 것과 내가 '알게 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의심이란 깨달으면 녹아버리는, 달콤한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