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를 거라 선 긋지 말기
족쇄는 누가 채우고 있는가
나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그 차이가 클수록 나와 다른 세계일 것이라 단정 짓고는 한다. 살아온 시대를 무시할 수 없어 어느 결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어느 결에서는 그렇지 않다. 나이는 그저 한해 한해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쌓인 것뿐인데 그게 어째서 관계를 가로막는 족쇄가 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에게서 단단하고 낡은 족쇄 하나를 발견했다.
이번 주 수요일이 할머니 생신이었다. 나는 엄마보다도 외할머니를 닮았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화려한 빛깔을 좋아하고 만개한 꽃들을 좋아하고. 그래서 예쁜 옷과 매니큐어로 치장한 할머니를 좋아했다. 나의 자랑이었으며 그런 모습이 좋았기 때문에. 그러다 예상치도 못한 부분에서 또 할머니와 닮은 점을 발견했다. 할머니는 글 읽는 걸 좋아하신다. 할머니를 모르던 시간이 없었지만 그건 처음 알았다.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몰랐던 것이 아닌가. 우리 집에 매달 오는 좋은 생각을 할머니가 먼저 구독하셨다는 걸 떠올렸더라면. 큰 글씨 좋은 생각이 항상 외갓집 어딘가, 눈에 보이는 곳에 놓여있었다는 걸 떠올렸더라면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능한 손녀는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해서 선물로 고민하던 나에게 엄마가 귀띔해주었을 때야 눈치챌 수 있었다.
“혹시 할머니 책 읽는 거 좋아하시나?”
요새 따라 책을 사는 일도 읽는 일도 잦아서 나온 질문이었다.
“당연하지. 어릴 때 내가 시 한 편 못 외우고 다닌다고 얼마나 구박했는데. 시를 엄청 좋아하셔.”
그때 머리를 쳤으면 깡통 치는 것처럼 맑은 소리가 났을 거다. 두 손녀는 단 한 번도 ‘책’을 사드린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집을 사드릴까, 고민을 하다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신다는 시집으로 결정했다.
평소 시를 많이 읽는 편은 아니라 좋아하는 시인의 책과 시 모음집을 골랐다. 큰 글씨 시집이 거의 없는 걸 보고 괜히 슬픈 마음이 들었다.
다 닳아서 가죽이 떨어진 폰케이스를 대신할 새 폰케이스와 시집 두 권을 들고 할머니를 찾았다. 선물을 꺼내듯이는 할머니 옆에서 열심히 설명을 덧붙였다.
“이거는요, 할머니가 시 좋아하신다 그래서 샀어요.”
폰케이스를 보고도 고맙다고만 하셨는데 시집을 드신 할머니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고마움을 넘어선 감격의 얼굴을 두 눈으로 보았다.
“좋은 생각 저거, 매달 오는 거 몇 번씩 본다. 고마워.”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그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의 감격이 전달되었기 때문일까.
집에 와서 에세이를 알아봤다. 할머니가 좋아하실 만할 글을 찾는 게 또 하나의 기쁨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에세이를 냈을 때 나의 가장 감사한 독자가 되어주실 것 같다.
단단한 줄 알았던 족쇄는 사실 무엇보다도 헐거웠다. 일단은 하나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