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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Feb 07. 2021

36.5도의 눈물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증명



뼈도 튼튼하고 멘탈도 나름 튼튼한 내가 유일하게 부실한 부분이 눈물샘이다. 눈이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눈물이 많다. 가끔 인공눈물을 깜박했을 때는 우는 게 더 빠르다고 생각할 정도로, 눈물이 쉽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횟수를 1부터 10까지 나눈다면 나는 분명 20이다. 척도를 벗어난 선일 게 틀림없다. 고등학생 때 정말 재미없는 영화를 봤다. 연말에 담임선생님이 틀어준 영화는 가족이 맞닥뜨린 재난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처음에는 집중하던 아이들이 딴짓을 하고 잠을 잤다. 맨 마지막에 가족이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 혼자만 눈물을 조금 흘렸다. 내 눈물이 그렇게 민망했던 적이 없다.

애니메이션 영화였던 '도리를 찾아서'를 보고 내가 울었다는 걸 알고 한동안 별명이 도리 보고 운 애가 돼버린 적도 있었다. 도리에 대한 가족들의 사랑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나고 말았다.




내 눈물은 대체적으로 재난이다. 사소한 재난.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면 눈물은 더 하다. 얘는 흘리지 말라고 꼭꼭 잠가놔도 어떻게든 그 사이로 한 방울씩 흘린다. 내 주인이 눈물이 된 기분이다.





울고싶지 않은데 눈물이 나요





그래서 나는 뭘 잘했다고 울어, 하는 말을 싫어한다. 울면 넘어갈 줄 알아? 하는 말은 더 싫어한다. 아니, 사람이 울 수도 있지. 그리고 눈물이 울고 싶어서 나오나? 그냥 알아서 흐르고 있는 애들이다. 내가 울고 싶어, 하고 눈에 힘을 빡 줘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왜 다들 모르는 걸까.

울고 싶어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나오니까 우는 거다. 울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눈물이 나오면 절로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눈물을 방패로 삼는다는 인식이 지긋지긋하게 싫다. 나에게 눈물이란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생리현상에 불과한데, 마치 내가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군다. 내가 방귀를 뀌거나 볼 일을 보는 건 그렇게 취급하지 않을 거면서 왜 그리 눈물에게만 깐깐하게 구는 건지.









내용도 개연성도 없이 눈물만 뽑아내려는 삼류 작품에도 눈물을 흘린다.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 마음에 쉽게 부응하는 눈물샘이다. 이쯤 되면 나한테서 눈물을 얻지 못한 건 작품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눈 앞이 흐릿해진다. 영화, 드라마 같은 영상매체와, 만화와 글을 가리지 않고 운다. 눈물은 공평하게 흐른다.



눈물이 왜 날까, 홀로 생각을 했다. 과학적인 이유를 바탕으로 하더라도 결국 뇌가 어떠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 시작을 더듬었다.

슬픈 장면이 있다. 누군가 죽고, 다치고. 감동적인 장면이 있다. 사랑하고, 만나고, 보답받고. 대체로 두 가지에서 나뉜다. 그걸 보고 나는 받아들이고 그 안의 사람들의 반응에 감화되며 상황 속에 나를 대입하기에 이른다.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나였어도, 하고 상상하고 있었다. 그럼 눈물을 흘린다.  


이런 결과는 좀 재밌었다. 단순히 어떤 자극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 상상과 생각들을 잔뜩 덧붙여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공감'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공감의 눈물은 대체적으로 뜨겁다. 내 얼굴이 차갑고 내 마음이 차가워도, 눈물은 뜨겁다. 내 안에 있는 게 쏟아져 나온다고 받아들일 만큼의 온도다. 36.5도, 때로는 35도, 때로는 37도의 눈물들이다.



눈물은 싫고 눈물 때문에 오해받는 건 더 싫다. 눈물을 흘리고 나면 머리가 멍해지는 것도, 눈물 때문에 얼굴이 찍찍해지는 것도 싫다. 그래도 짜증 나지 않는 건 그게 하나의 증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살아있고 세상의 어떤 것들을 위해 흘려줄 무언가가 있다는 것. 오로지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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