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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Jun 02. 2021

갑작스러운 손님

날마다 입어요




머릿속을 스치는 문장이 있었다. 날마다 입어요. 소설 소공녀 속 세라에게 람다스 쪽에서 보낸 새 옷들이 담긴 선물 상자에 적혀있던 말이다. 공주에서 순식간에 거지가 된 세라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의 시작. 이 옷을 받고서 그날 하루 세라는 다시 공주로 되돌아오게 된다.



어느 날 문득 이 문장이 생각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를 문장을, 머릿속에서 가끔 홀로 읊조렸다.










변명하자면 5월이 바빴다. 바쁘다는 단어에도 정도가 있다면, 최고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밑의 단계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내가 겪은 바쁨 중에서는 최고조였다.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조차 없이 과제하고 회의하고 과제하고 회의하고의 반복이었다. 잘 수 있는 시간조차 줄어들어 짬을 내서 잠을 잤다.


잡생각을 할 수 없는 바쁨에서도 서러움은 잊지 않고 찾아왔다.



비가 아주 많이 오던 날,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1호선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거센 빗줄기와 인파 속에서 지칠 만큼 지쳐있었다. 전날 새벽 늦게까지 회의하는 바람에 배는 고팠다. 기온을 확인하지 않고 입은 반팔은 추웠다. 춥고 지치고 배고팠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고만 싶었다.



그때 떠오른 게 세라였다. 몸에 맞지도 않는 까만 원피스를 입고서, 물이 다 새는 구두를 신고서 비 오는 날 심부름을 나갔던 세라. 우산을 쓰고 따뜻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덧씌워 상상하며 견뎠던 세라. 그림으로만 보고 글로만 읽었던 세라의 비참함이 갑자기 와닿았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몸이 고되고 힘들어도 시키는 일을 하기 위해 나를 외면해야 하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웃음이 났다. 아, 세라. 나는 분명 너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읽었는데 지금에서야 너를 이해하게 되었구나. 이럴 때 떠오르는 게 너라니. 아르바이트를 빠지고 싶다는 생각보다, 실컷 잠이나 자고 싶다는 생각보다, 비참했던 너의 일부가 떠오르다니.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다. 나도 몰랐던 내 안에 이야기들이 새겨진 기분이었다. 몇 번이나 읽었던 글자들이 나를 감싸고, 나를 다독이고, 내 삶을 같이 만들어나갔다.










아주 바쁜 순간들에도 글을 찾았다. 최근에는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 수상집을 보고 있다. 문학 공모전도 아니고 스토리 공모전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재밌는 글들이길래 싶은 마음이었다. 수상집은 괜히 수상집이 아니었다. 여태 내가 본 게 우리나라 지도였다면 이건 세계지도를 본 기분이었다. 이런 글들이 있다고?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이런 세계관이 있다고? 아르바이트 시간에 생동감이 생겨났다.



오늘도 수상집을 읽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문장들도 좋지만 지금을 잊게 해주는 스토리들도 좋을 것 같았다. 남들이 보기엔 바보 같을 상상을 펼치면서, 글자에 나를 온전히 맡기며 순간을 되새기는. 앞으로도 문장들이 나의 삶에 불쑥, 불쑥 나타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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