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여행을 다녀오자 나에게 놓인 건 현실이었다. 밀린 강의도 들어야 했고 과제도 해야 했고 팀 회의도 해야 하고 동아리도 해야 하고. 이 나라를 떠나게 될 나를 위해 묵묵하게 준비해오던 것들이 너무 무거웠을까.
나는 소리 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늪에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가만히 서있었다. 딱히 힘든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니었고 단지 지친 것뿐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늪의 흐름에 휩쓸려간다. 천천히 쓸려가고 있었다.
내가 가장 기대하던 시간이 찾아왔다. 바람에 따스한 기운이 감돌던 2월부터, 하늘을 대고 냄새를 맡았다. 봄이 오는 냄새가 났다. 푸른 잎들이 조금씩 많아져서 세상의 빛깔이 달라졌다. 줄곧 봄을 기다렸다.
내가 태어난 곳은 벚꽃의 도시. 발이 닿는 곳이 다 꽃길이어서, 어딜 걸어도 좋은 곳이다. 전 국민이 사랑하는 벚꽃 축제가 열리고, 그곳에서 피어난 추억들도 한 두 개가 아니다. 평생의 봄을 꽃 속에서 지냈다. 만개한 꽃 밑을 뛰어다니는 날 보며 엄마는 무슨 꽃이 그리도 좋냐고 묻는다. 태어난 이래로 꽃을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의 봄은 꽃이었고, 꽃이 곧 봄이었으니. 그럼에도 나는 그 풍경을 사랑했다.
벚꽃을 볼 때면 눈물이 난다. 왠지 가슴이 아프고 울고 싶어 진다. 슬픈 건 아닌데 꼭 그랬다.
봄이 지나면 줄곧 봄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이번 봄을 오랫동안 그리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여행을 다녀오니 갑자기 봄이 찾아와 있었고 거짓말 같았다. 지금이 봄이라고? 봄이 왔다고? 세상이 나를 상대로 거짓말하는 기분이야. 나는 명백하게 봄한테 따돌림당하고 있었다. 방에 가만히 누워서 봄이 가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꽃구경도 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나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던 밤에 아빠가 심부름을 시켰다. 카드와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며 편의점을 다녀오라고 했다. 외출 한 번에 만원이라니 누구라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맞이한 밤은 따스했다. 내가 겪었던 낮보다도 따스했다.
그래서 심부름을 갔다가 다시 집 밖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서 집 앞 공원에 갔다. 그곳에는 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직 모르는 건, 낮 벚꽃보다 밤 벚꽃이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까만 하늘과 대조되는 선명한 분홍빛. 파란 하늘보다도 까만 하늘에서 더 도드라져 보인다. 가끔 달이나 별이 같이 보일 때가 있는데 그때의 풍경은 말로 할 수 없게 아름답다.
내가 사랑하는 밤 벚꽃길은 조용했다. 낮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라 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멀리 가지도 않고 그곳에 서서 봄을 만끽했다. 스쳐가듯 보았던 꽃들이 마음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랜만이야, 널 보러 왔어. 밤은 고요해서 기분이 좋아.
내가 딛고 있는 곳은 분명히 딱딱한 바닥이었다. 어느 순간 꽃들이 날 바닥으로 데려다 놓은 것이다. 이전처럼 가슴이 아프고,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자연을 향한 경이로운 마음. 자연이라는 단어가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빼앗긴 봄은 사실 내 뒤에 있었다. 내가 바라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서있었다. 내가 돌아봐주길 바라며 계속해서.
예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꽃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졌다는 점. 오늘도 내가 널 보러 왔노라고 속삭여주고 싶었다. 어쩜 너는 이렇게 아름답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태껏 피어있느라 수고했다고 토닥여주고 싶었다. 그걸 견디지 못해서 사람이 없는 곳에서만 간간히 말을 걸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서 말을 걸면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따라왔다.
꽃의 도시에서 태어나서 다행이야. 내가 이 곳에서 태어나서, 내가 이 곳을 사랑하고, 이 곳이 나의 고향이어서 다행이야. 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야. 다음 해에 또 내가 만나러 올게. 그러니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또 활짝 피어줘. 꽃망울 하나하나를 튀어 꽃의 세상을 만들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