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애환(哀歡)이 서려있는 술! 주린 배를 달래주던 술! 맑은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 가릴 것 없이 생각나는 술! 새참(들판)의 주인공ㆍ빈대떡의 단짝인 술! 맛과 영양만점인 술!
뚜껑을 열기 전에 반드시 뒤집거나, 위ㆍ아래로 있는 힘껏 흔들어야 하는 술! 뚜껑을 따는 순간 끓어오르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보글보글 넘치고야 마는 술! 반드시 양은 주전자와 양은그릇이어야만 하는 술! 바로 우리 고유의 [막ㆍ걸ㆍ리]다.
'막걸리'는 양은 주전자와 양은그릇이 있어야만 조화(調和)를 이룬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랬다. 온몸에 생채기가 나고 찌그러진 채로 난롯불에 달구어질지언정, 술과 함께 숱 한세월 고달픈 이웃의 애환과 뭇사람들의 넋두리를 받아주었다.
그 아픔을 간직한 채 앞으로 얼마나 더 긴 시간을 또 다른 이들의 술주정(?)에 상처 받아야 할지? 오늘도 주인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두침침한 주막집 기둥에 매달린 채 정겨운 모습으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을 막걸리 주전자를, 막걸리를 사랑하는 국민이면 한 번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그 고마움을 알아야 한다.
뭇사람들의 쌓인 울분과 넋두리를 받아준 흔적이 고스란히 훈장(?)으로 남아있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와 그릇의 커다란 희생만큼이나, 막걸리가 가지고 있는 이름도 많다. 향주(鄕酒, 백성의 술), 농주(農酒, 농부의 술), 탁주(濁酒, 탁하다 해서), 제주(祭酒, 제사에 올려), 가주(家酒, 집집마다 담가/ 佳酒, 술을 마시면 모두 아름다워), 백주(白酒, 흰 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막(마구) 걸러서 막 먹는 술!’이라 해서 막걸리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제조과정만큼은 고난도의 기술이 조화를 이루어야 생산되는 게 막걸리이기도 하다.
“쌀(고두밥/ 고들고들한 밥)과 누룩, 물(용수), 항아리, 온도”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여기에 ‘정성(精誠)’까지 더해져야 하기 때문에 공정(工程)으로만 따지면 맥주보다 가격이 비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브랜드와 유통기한(10일~1년), 용량(크기 360~1,500㎖), 재질(페트병, 유리병, 캔, 팩, 분말), 농도(도수 5~19%), 가격(1,150원~1만 5000원~11만 원)은 물론,
지방마다 농ㆍ특산물을 활용한 더덕ㆍ인삼ㆍ오미자ㆍ복분자ㆍ선인장ㆍ민들레ㆍ토란ㆍ유자ㆍ대추ㆍ포도ㆍ체리ㆍ감ㆍ밤ㆍ사과 막걸리부터,
지역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를 굳히고 차별화를 하고 있는 장수ㆍ달빛ㆍ지평生ㆍ황칠ㆍ1000억 유산균ㆍ느린 마을ㆍ금정산성ㆍ월매ㆍ우렁이쌀ㆍ왕알밤ㆍ산소ㆍ나루ㆍ복순도가ㆍ해창 12ㆍ나루生ㆍ호랑이 배꼽ㆍ포천 일동ㆍ영탁ㆍ이화 백수ㆍ화성ㆍ서울ㆍ골목ㆍ 롤스로이스ㆍ대박ㆍ인생 막걸리 등 전국 1,200여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종류는 헤일 수 조차 없다.
“막걸리!”하면 어릴 적 기억도 생생하다. 1960~‘70년대 초 어머니가 동전 몇 닢과 노랑 양은 주전자를 쥐어주면 막걸리를 받아(사) 오라는 것이었다. 양조장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구수한 술밥(술을 담글 때 물에 불려 찌는 밥) 냄새는 코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며,
술독(항아리)은 왜 그리도 컸던지 내 키의 두 배쯤으로 어린 나는 술독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항아리가 엄청 크기도 했지만 어린 마음에 그때는 술밥이 그렇게도 먹고 싶었었다. 어쩌다 운(運)이 좋아 아저씨로부터 한 주먹 얻는 날이면 그 맛은 어느 것에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맛있었다.
쌀알이 탱글탱글하면서도 오도독 오도독 소리가 날 정도로 씹히던 맛은 꿀맛 이상으로 반찬 없이도 목구멍으로 잘 넘어갔다. 5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생각하면 입안의 침이 꿀꺽 삼켜질 정도로 그 어느 음식에 비유할 수가 없다.
햇빛이 안 비추는 양조장 모퉁이 땅속에 묻어놓은 항아리에서 아저씨가 허리 굽혀 휘휘 저어 한 되(됫박) 퍼서 주전자에 따라주면 그걸 들고 집에 온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르신 할아버지는 양은그릇에 한가득 따라 수염이 막걸리 잔에 담긴 것도 잊으신 채 단숨에 한 그릇을 들이켜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이처럼 향수 가득한 막걸리가 최근에 국민으로부터 선풍적(旋風的)인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다. 1달러(약 1,100원) 면 지금도 양조장까지 굳이 가지 않아도 인근 마트나 슈퍼에서 쉽게 구입(1,150~1,500원)할 수 있으니 막걸리는 숫한 세월 우리와 함께 해온 국민대표 술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제 21세기 트렌드에 맞춰 값싸고 달달한 맛의 이미지를 벗고 고급화로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청년 창업(양조)인들이 주체가 되어 유기농 찹쌀과 멥쌀만으로 2개월 동안 까다로운 숙성기간(제조일로부터는 90일 소요)을 거쳐 한 번에 300병 정도 빚는(이름 생략)다. 주로 젊은 세대들이 소비층이라고 한다.
맛이 독특해 스타트업 붐을 타고 주문생산으로 제조하고 있으며 1병(18%, 900ml)의 소비자 가격은 무려 11만 원이라고 하니, 대한민국 막걸리 중 최고가로 본격적으로 명품시장의 반열에 뛰어들었다. 지난가을부터 출시(出市)되기 시작했는데 위스키나 와인 뺨칠 정도로 비싸지만 출고될 때마다 완판이라고 한다. 막걸리 마니아들은 이 술을 구입하려고 서울에서 생산지 양조장까지 찾아가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게 비싼 막걸리가 없어서 못 판다고 하는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솔직히 처음에는 의문이 들었지만 재료ㆍ시간ㆍ과정ㆍ희소성 등을 감안할 때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어찌 되었건 막걸리 마니아와 전통주 전문가들 사이에는 화제라고 한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 등에는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서 사 먹어 봤다.’ ‘너무 궁금해서 먹어봤다.’등 후기(後記)도 등장한다. 이제는 막걸리가 서민의 술이라는 생각을 지워야 할 것 같다. 긴 숙성기간과 혼이 서린 고가의 막걸리를 앞으로는 품위 있고 폼 나게 먹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어이 친구! 대포(大匏)나 한 잔 하러 가세‘ 하면, 으레(거의 틀림없이 언제나)이 막걸리였고 그것이 시대적 정서였으며, 저렴한 가격으로 국민 마음에 풍류를 읊게 했었는데 이제는 비싸서 또는 없어서 못 먹는 막걸리도 있으니 세상 많이 변했다. 100달러(약 11만 2,000원) 짜리 막걸리를 언제쯤 품위 있고 폼 좀 내며 먹을 수 있을까?
「기분 좋아서 한잔, 고달 퍼서 한잔, 외로워서 한잔…, 한잔 술은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넉 잔 술은 학이 되어 하늘을 날며, 다섯 잔은 염라대왕도 두렵지 않다.」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고 술을 예찬(禮讚)하거나 권장하는 건 절대 아니다.
때로는 찌그러진 주전자와 양은그릇의 막걸리가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보석이 담겨있으면 보석함도 귀한 대접을 받듯, 비싼 가격의 막걸리가 부담이 된다면 비록 1달러짜리 막걸리일지언정 이왕이면 품위 있고 폼 나게 마셔보자. 잔(盞)이 고급스러우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품위 있게 먹을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두주불사(斗酒不辭)로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일이 없도록 과음은 금물이니 절대로 지켜야 한다. 한잔 술(막걸리)처럼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골드 세라믹 잔 / 한반도 평화의 잔 / 유기그릇 잔 / 보스턴 글라스 잔
『아버지 심부름으로 노랑 주전자 들고 막걸리 사러 간다. 마음씨 좋은 주인아저씨 한 주전자 가득 꾹꾹 눌러 담아준다.
날씨는 덥고 땀은 비 오듯 목은 타들어 가고, 입은 자연히 주전자 주둥이로 간다. 한 모금 두 모금 빨다 보니 알 딸딸 정신이 혼미하다.
아버지께 혼날까 봐 개울물이라도 채워야지. 막걸리잔 앞에 놓고 아버지 생각에 목이 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