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하고 싶다고 말하는 용기
아이를 재우고 주말을 맞아 신랑과 고기를 구워 먹으며 요즘 가장 재밌게 보고 있는 방송, [놀면뭐하니]를 틀어놓고 있었다. 겨울 활동 의사를 묻는 질문에 임신 계획이 있다, 마지막 선물로는 임신테스트기를 받고 싶다, 는 이효리의 대답에 밥그릇을 치우던 손길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농담인 듯 말하는(그러나 진담인 것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지난날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안쓰러웠다. 누가 누굴 안쓰러워하나 싶지만,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고 화려한 명예랑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 말을 하는 그녀는 그저 40대 초반의, 엄마가 되고 싶은 평범한 여자였다. 평소 그녀의 팬이었던 나는,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완벽해 보였던 여자의 시린 속살을 본 것 같아 괜히 코 끝이 찡해졌다.
‘노산’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우리나라에서 만 35세 여성이 자신의 임신 계획을 말할 때에는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 어쨌든 나는 그랬다. 친정엄마를 포함해 일찌감치 엄마가 된 사람들에게선 “그렇게 노는 거 좋아하더니, 미리미리 준비 좀 하지.” 하는, 엄마가 되지 않을 사람들에겐 “왜 그렇게 임신에 목을 매? 애 잘 키울 자신 있어?” 하는.. 어느 쪽이든 나의 뼈를 때리는, 책망 아닌 책망을 들을까 지레 겁부터 났다. 내 주변에 그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도 말 그대로 지레. 그 말들은 오히려 마음속의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는 힐난일 테다.
현실에선 사실 상대가 어떤 부류든 상관없이 비슷한 말을 듣는다.
마음 편히 가져! 그래야 생긴대.
나 아는 누구누구도 포기하니까 생겼다더라.
너무나 많이 들었던 말. 아이에 마음 쓰느라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던 나를 아껴주는 고마운 의도임을 알지만, 솔직히 별로 듣고 싶지는 않았던 이 멘트로 대부분의 대화는 어영부영 끝이 났다. 그런 상대를 붙잡고 내 말 좀 더 들어달라 요구할만한 뻔뻔함은, 나에겐 없었다. 더 말했다간 연연하는 사람이 되고, 연연하는 사람은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포기하지 못하면 임신이 되지 않는다니까 어쩌겠는가. 입을 다물 수밖에. 속으로는 여전히 엄청나게 연연하고 있고, 포기도 안되지만 그런 척이라도 하는 수밖에.
이런 시기를 지나 겨우겨우 엄마가 된 나에게, 세상을 향해 기죽지 않고 임신하고 싶다 말하는 이효리의 모습은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임신으로부터 왔다. 그래서 내가 임신이 어렵다는 사실은, 그것이 아무리 내 탓이 아님을 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자존감을 불필요하게 갉아먹는 원인이 되기 쉽다. 그녀라고 상처가 아닐 리 없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책망과 비아냥(내가 그토록 듣기 두려워했던)을 충고랍시고 떠들어댈지도 모른다. 원치 않는 동정을 받을 수도 있다. 나라면 내 상처를 감추고 임신에 개의치 않는 척했을 텐데, 그녀는 상처를 드러내고 당당히 나는 개의한다, 밝혔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죄책감 갖지 않는다.
이거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곧잘 이성과 논리를 무시한 채 나의 나약함을 파고드니까. 내가 아무도 준 적 없는 상처를 혼자 받으며 아파했던 일에, 그녀는 이다지도 당당하고 단단할 수 있는 이유다. 그녀의 건강한 자존감이 눈부시게 아름답고, 눈물 나게 부럽다.
이효리는 좋은 엄마가 될 것이다.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엄마라면, 그의 아이는 보나 마나다. 행복하게 잘 자랄 것이다. 감히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면, 그녀가 엄마아빠의 환한 미소를 닮은 햇살 같은 아이를 곧 만나기를, 부디 그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길지 않기를, 그러나 만에 하나 엄마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도 당연히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고맙다고, 여전히 찌꺼기로 남아 있던 내 과거의 아픔이 오늘 당신으로 인해 조금 더 나아졌다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