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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Mar 02. 2021

500유로와 바꾼 열쇠

독일에서 얻은 가장 비싼 교훈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그러하듯이 독일 사람들도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다닌다. 워낙 오래된 건물들이 많기도 하고, 번호키 자체를 믿지 않아서 이기도 하다. 워낙 보수적인 독일 사람들은 오죽하면 신용카드나 인터넷 뱅킹도 못 믿어서 안 쓴다는 경우도 있다. 변화를 싫어한다고도. 집 계약을 하고 나서 관리인(Hausmeister, 하우스마이스터) 할아버지로부터 거대한 열쇠 꾸러미를 받았다. 건물 현관 열쇠 2개, 집 열쇠 2개, 우편함 열쇠 3개, 지하실 열쇠 2개. 이사를 나갈 때에는 물론 하나도 빠짐없이 반납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글쎄... 초등학교 이후로는 늘 번호키만 써 왔기 때문에 열쇠 자체가 너무나 낯설게 다가왔다.


 이사를 한 지 한 달쯤 지난 토요일, 날씨가 좋아서 여유롭게 빨래를 했다. 독일의 많은 집들은 지하 창고에 세탁기를 둘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나이가 많은 우리 집은 지하가 너무 협소해서 꼭대기층인 5층에 '지하실'이 있다. 세탁기가 다 돌아갔을 시간에 맞춰 빨래 바구니를 들고 나왔는데, 문을 닫는 순간 열쇠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불행히도 우리 집을 포함해서 독일의 많은 문들은 밖에서는 닫기만 해도 문이 잠기도록 되어있다. 이 문을 완전히 닫기 전에 깨달았어야 하는데... 빨래 가지러 가는 거라 핸드폰도, 지갑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여서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어디선가 글을 읽었는데, 페트병이나 빳빳한 코팅된 종이 같은 걸로도 문을 딸 수 있다고 했었다. 열쇠공을 부르면 그렇게 따 주는 경우가 많다고. 그 전날 1층 내부 현관에 내놓았던 재활용품을 뒤져서 그럴싸한 것을 찾아냈지만, 우리 집 문은 틈이 너무 좁아서인지 그 어떤 것도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에는 열쇠공을 불러야 해결이 되는 문제. 핸드폰이 없으니 2층과 3층에 올라가 초인종을 눌러보았지만 조용하다. 생각하자 생각 생각. 건물 밖으로 아예 나가서 옆 가게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폰을 빌리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면 건물 현관부터 따야 하니 문제가 더 커진다. 결국 계단에 주저앉아 2층이나 3층에 사는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창문 너머 파란 하늘을 부질없이 바라보며 30여분을 기다렸을까. 3층에 사는 사람이 돌아왔다. 짧은 독일어로 열쇠를 두고 나왔음을 설명하고 열쇠공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20-30분쯤 걸린다는 말을 전해주고 3층 사람이 사라졌다.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고 열쇠공이 나타났다. 내가 시도했던 것처럼 빳빳하고 얇은 판을 문틈 사이로 넣으려고 했지만, 역시나 너무 좁아 조금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자 대뜸 한다는 말이 열쇠를 통으로 갈아야 한다고. 아니 한국에서는 어르신들이 그냥 따주셨던 거 같은데? 실력이 없는 거 아니야? 다른 방법이 없냐고 하니 단호하게 없단다. 어쩔 수 없지. 내가 가진 열쇠 2개는 모두 집 안에 있다. 가격이 얼마냐고 물으니 약 500유로란다. 뭐라고? 500유로?


 그는 본인이 차로 여기까지 오는 시간에 대한 비용과, 열쇠를 가는데 소요되는 시간에 대한 비용을 기본으로 둔 후, 토요일 낮이니 1.5배를 하고, 기적의 논리로 열쇠의 가격을 실린더 1mm당 2유로로 책정해서 부가세 19% 포함 총합이 557유로라는 계산 결과를 들이밀었다. 도저히 설득력이 없었지만, 그가 여기 온 이상 출장 비용을 지급해야 하고, 다른 열쇠공을 부르기 위한 핸드폰도 없는 나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그는 이런 절박한 내 상황을 너무나 잘 이용하고 있었다. 그만한 현금도 없어, 라는 말에도 '괜찮아 카드리더기도 있어'라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 후로 그가 드릴로 원래 있던 열쇠 실린더부에 구멍을 뚫고, 뜯어내고, 새 실린더를 끼우는 동안 나는 체념한 체 서 있었다. 그저 이 모든 게 끝나고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카드리더기를 꺼내 비용을 청구한 후 떠나갔다. 빨래를 찾아 널고 나서, 폭풍같이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마트에서 달달한 것들을 잔뜩 사 왔다.


 나중에 조금 진정이 되고 나니, 너무 부당한 금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인인 지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열쇠공은 너에게 어마어마한 바가지를 씌운 것 같고,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답이 돌아왔다. 카드리더기를 갖고 있었다고 하니 천하의 사기꾼이라며 이미 돈을 냈다면 안타깝게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 앞으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지불하지 말고 계좌 이체를 해 주겠다고 한 뒤, 소비자 보호 단체 같은 곳에 연락을 해서 금액을 조정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고. 그리고 절대 구글에서 제일 위에 뜨는 업체에 전화하지 말고, 집에서 가깝고 평점이 좋은 곳으로 골라야 한다는 조언도 해 주었다. 청구서에 주소를 보니, 내가 사는 도시가 아닌, 집에서 40km쯤 떨어진 도시에 위치한 업체였다. 아마 3층 사람은 그냥 맨 위에 있는 업체에 전화를 했나 보다.


 개인 책임 보험 (Privathaftpflichtversicherung, 제삼자를 다치게 하거나 손해를 입혔을 때 보상하는 보험)을 들 때, 옵션으로 열쇠 분실이 보상되는 것으로 가입한 것이 기억나서 조항도 찾아보았다. 하지만 정말 '분실'한 경우만 보상이 되기 때문에, 나처럼 집 안에 두고 나오는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 열쇠를 잃어버렸다면, 누군가 침입할 우려가 있는 현관 열쇠도 함께 바꾸고, 당연히 건물 내 다른 가정에도 그 열쇠를 나눠줘야 하기 때문에 아예 경우가 다르다. 생각할수록 속이 쓰리지만 이미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냥 친구들에게 실컷 불평을 하고, 문에 '열쇠'라고 써서 붙이는 것으로 이 사건을 잊기로 결심했다.


 그로부터 약 6개월 뒤, 쌀쌀한 늦가을에 정말 믿을 수 없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빨래 바구니만 덜렁 들고 나와서 문을 닫아버린 것. 정말 다행히도 가까운 동료에게 열쇠 한 세트를 맡겨 놓은 상황이었고, 그 순간에 우리 집 근처 카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카페로 갔다. 머리도 감지 않고 운동복을 입고 쪼리를 신은 부끄러운 차림이라 사람들이 다 쳐다봤지만 500유로의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 후로 트라우마가 생겨 집 밖을 나갈 때는 열쇠를 챙겼나 세 번, 네 번 확인하고, 빨래를 하러 갈 때는 문을 살짝 열어두고 가는 버릇이 생겼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쫄깃해지는 경험은 이제 더 이상 없어도 될 것 같다. 또 한 번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멍청하다고 써 붙이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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