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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콘서트장의 함성과 불빛

2부. 도시의 소음과 리듬, 관계와 익명성 사이

by 조하나


약속된 시간이 되면, 공연장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암전됩니다. 방금 전까지 웅성거리던 수많은 사람들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그 자리를 잠시 숨 막히는 정적과 기대감으로 가득 찬 어둠이 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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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순간, 무대 위에서 한 줄기 강렬한 조명이 터져 나오고, 첫 번째 기타 리프나 드럼 비트가 심장을 직접 때리는 듯한 거대한 음압으로 공간을 뒤흔듭니다. 그와 동시에, 객석을 가득 메운 수천, 수만의 관중들은 마치 한 몸처럼 약속이라도 한 듯 거대한 함성을 터뜨립니다. 어둠 속에서 각기 다른 개인이었던 ‘나’는, 이 폭발적인 빛과 소리의 소용돌이 속으로 기꺼이 빨려 들어가, 거대한 ‘우리’라는 이름의 파도 속에 하나의 물방울이 되는 경험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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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개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집단적인 황홀경에 빠져드는 경험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우리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첫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제시한 두 가지 예술 충동, 즉 ‘아폴론적인 것(The Apollonian)’과 ‘디오니소스적인 것(The Dionysian)’이라는 개념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아폴론적인 것’은 태양의 신 아폴론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질서, 조화, 개별성, 그리고 아름다운 꿈이나 환상과 같은 ‘형식의 예술’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명확한 윤곽과 이성적인 통제를 통해 세계의 고통을 아름다운 가상으로 덮어주는 힘입니다. 콘서트장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대부분 이 아폴론적인 요소들입니다. 정교하게 설계된 무대 장치, 현란하지만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조명, 잘 짜인 곡의 순서(셋 리스트), 그리고 무대 위에서 완벽한 연주와 노래를 선보이는 아티스트의 모습까지. 이 모든 것은 관객인 ‘나’와 무대 위의 ‘너’라는 명확한 경계 안에서 펼쳐지는, 아름답게 제어된 하나의 꿈과도 같습니다.


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술과 광기의 신 디오니소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모든 개별적인 경계가 무너지고 거대한 생명의 흐름 속으로 몰입되는 ‘도취의 예술’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비이성적이고, 혼돈스러우며, 원초적인 집단적 열광의 상태입니다. 콘서트장에서 우리의 심장을 직접 울리는 육중한 베이스 사운드, 수만 명이 하나의 목소리로 따라 부르는 ‘떼창’,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땀 흘리며 춤추는 행위,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강력한 감정의 해방감(카타르시스)이 바로 이 디오니소스적인 경험입니다. 이 순간, ‘나’라는 개별자는 잠시 희미해지고, 우리는 음악과 군중이라는 거대한 공동체와 하나가 되는 듯한 합일의 황홀경을 맛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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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위대한 예술이 바로 이 아폴론적인 꿈의 세계와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의 세계가 서로 투쟁하고 또 화해하며 결합할 때 탄생한다고 보았습니다. 콘서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통제된 시공간 안에서, 일상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강렬한 도취와 해방감을 맛보며, 잠시나마 삶의 고통과 개인이라는 굴레를 잊게 되는 것이지요.


니체가 말한 아폴론적인 형식과 디오니소스적인 열광의 가장 황홀한 결합,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공감과 연대의 모습을 우리는 전설적인 록 밴드 퀸(Queen)의 1985년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에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통해 다시 한번 감동적으로 체험했던 이 20분간의 무대는, 단순한 음악 공연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제의(祭儀)이자 집단적 카타르시스의 현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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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대의 중심에는 소수자이자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안고 살았던 위대한 아티스트, 프레디 머큐리가 있습니다. 그는 무대 위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로 7만 명이 넘는 관중을, 그리고 전 세계 10억 명이 넘는 시청자를 완벽하게 장악합니다. 그가 주먹을 허공에 내지르며 “에-오”를 선창 하면, 거대한 경기장을 가득 메운 군중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의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 외칩니다. 이 상징적인 장면에서, 무대 위 아티스트와 객석의 관중이라는 아폴론적인 경계는 완전히 허물어집니다. 모두가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심장 박동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디오니소스적 합일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특히, ‘We Are the Champions’를 함께 부르는 순간은 이 경험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이 노래는 단지 승리의 찬가가 아니라, 수많은 시련과 패배감 속에서도 끝까지 버텨온 모든 이들을 위한 위로와 긍정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나는 패배자’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개인들이 이 노래를 함께 부르며, ‘아니,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서 승리한 챔피언이다’라는 강력한 연대감을 공유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디오니소스적 열광을 넘어, 각자의 아픔과 소외감을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 확인하고 위로하며 치유하는 ‘소외된 자들의 연대’가 이루어지는 숭고한 순간입니다. 프레디 머큐리라는 비범한 ‘아웃사이더’는, 평범한 ‘아웃사이더’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 거대한 울림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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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이 디오니소스적인 집단적 열광이 가진 또 다른 얼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긍정적인 연대를 만들어내는 힘은, 때로는 개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맹목적인 광기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핑크 플로이드의 벽>은, 주인공 록 스타가 군중을 향해 파시즘적인 선동을 하는 장면을 통해 이러한 집단적 광기의 공포를 충격적으로 묘사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강력하고 매혹적인 집단적 경험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그 뜨거운 에너지를 우리 삶의 긍정적인 힘으로 변환시킬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 해답은, 니체가 말한 두 가지 힘 사이에서 깨어 있는 의식으로 능숙하게 줄타기를 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을 것입니다. 디오니소스적인 열광에 기꺼이 몸을 맡겨 일상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짜릿한 해방감을 만끽하되, 결코 개인으로서의 비판적 사유와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라는 아폴론적인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콘서트장이라는 특별한 공간은, 우리가 ‘‘우리’라는 집단 속에서 어떻게 ‘나’로서 존재할 것인가’를 배우는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과도 같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타인과 깊이 공감하고 연대하는 기쁨을 배우는 동시에, 그 군중의 힘에 맹목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지키는 법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콘서트장의 뜨거운 함성 속에서도, 혹은 일상의 차가운 침묵 속에서도, 이처럼 우리 자신과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 철학의 순간들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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