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낯선 사람의 어깨에 기대어 작은 촛불 하나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서 있던 그 밤을 기억하십니까? 개인의 손에 들린 촛불은 여리고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지만, 그것이 수만, 수십만 개가 모여 거대한 빛의 강물을 이루는 순간, 우리는 경이로운 광경과 마주하게 됩니다. 내 옆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같은 구호를 외치고, 같은 노래를 부르며, 같은 염원을 담아 든 촛불의 온기를 나누는 그 순간, ‘나’라는 고립된 섬들은 서로 연결되어 ‘우리’라는 거대한 대륙이 되는 기적과도 같은 체험을 합니다.
이처럼 광장은 단순히 텅 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개인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특별한 무대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익명성의 군중이 어떻게 공동의 목표를 가진 ‘시민’이 되는지, 차가운 무관심이 어떻게 뜨거운 ‘연대’의 감정으로 변모하는지를 목격합니다.
개인의 나약한 목소리들이 모여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함성이 되는 이 광장의 경험 속에는 과연 어떤 철학적, 심리학적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일까요?
광장에 모인 수많은 촛불의 물결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물리적 사실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곳에서는 익명의 개인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공동의 목소리를 내며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내는, 매우 중요한 정치철학적 사건이 펼쳐집니다.
독일 출신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행위에 주목했습니다. 그녀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하며, 이 중 ‘행위’야말로 타인들 앞에서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세상에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게 하는, 가장 인간다운 활동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렌트에게 진정한 자유와 정치는 바로 이 ‘공적 영역’, 즉 광장과 같은 공간에서 동등한 시민들이 함께 ‘행위’할 때 실현되는 것이었습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서는 우리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바로 이 ‘행위’의 시작이며, 그 행위들이 모여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힘, 즉 ‘권력’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각기 다른 개인들을 하나의 강력한 ‘우리’로 묶어주는 ‘연대’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심리학적으로 우리는 ‘사회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집단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광장에서, 우리는 ‘나’라는 개인을 넘어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이라는 더 큰 집단의 일원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공유된 정체성은 강력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낳고,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함께’라는 생각은 개인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를 부여합니다.
여기에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말한 ‘집단적 열광’이 더해집니다. 같은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는 수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구호를 외칠 때, 그곳에는 마치 종교적 의례와도 같은 뜨거운 에너지와 집단적인 희열이 발생합니다. 이 열광적인 에너지는 개인들을 더욱 강하게 하나로 묶어주며, ‘우리는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강렬한 집단적 신념을 만들어 내는 심리적 동력이 됩니다.
하지만 광장에서의 연대는 이러한 뜨거운 감정의 공유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며 책임을 나누어지려는 ‘철학적 연대’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단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라, 그 고통이 바로 나의 문제일 수 있다는 상호 인정에 기반합니다. 내 옆의 낯선 사람이 든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나의 촛불로 다시 불을 붙여주는 작은 행위 속에, 바로 이러한 상호 인정과 책임의 철학이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광장에서의 연대는, 아렌트가 말한 개인의 위대한 ‘행위’가, 뒤르켐이 말한 ‘집단적 열광’을 거쳐, 서로를 책임지는 윤리적 관계로 발전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광장에서 개인이 ‘우리’가 되어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위대한 ‘행위’와 뜨거운 ‘연대’의 순간은, 시대를 넘어 수많은 예술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걸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iberty Leading the People)>은 그 장엄한 순간을 포착한 가장 상징적인 작품일 것입니다.
이 그림은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을 배경으로, 무너진 바리케이트를 넘어 전진하는 혁명군과 그 중심에서 삼색기를 높이 든 자유의 여신의 모습을 극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는 부르주아, 노동자, 소년 등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오직 ‘자유’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뭉쳐 있습니다. 이는 바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각자의 사적인 삶을 잠시 접어두고 공적 영역에 나와 함께 ‘행위’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21세기의 영국 록 밴드 콜드플레이는 바로 이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자신들의 앨범커버로 사용했습니다. 노래의 화자는 ‘나는 한때 세상을 지배했지, 나의 말 한마디에 바다가 솟아오르곤 했어(I used to rule the world, Seas would rise when I gave the word)’라고 노래하며 자신의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회상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아침이면 홀로 잠들고, 한때는 내 것이었던 거리를 쓸고 다니지(Now in the morning I sleep alone, Sweep the streets I used to own)’라고 탄식합니다.
한때는 자신을 향해 환호했던 군중, 그 광장의 목소리들이 이제는 ‘혁명가들이 은쟁반 위의 내 목을 기다린다(Revolutionaries wait, For my head on a silver plate)’고 노래하며 자신을 심판하는 소리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노래의 장엄한 사운드는 그의 과거의 권세를 떠올리게 하지만, 가사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덧없이 사라졌는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비극성을 극대화합니다.
이처럼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광장에 모인 ‘우리(민중)’의 시선에서 혁명의 뜨거운 열망과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면, 콜드플레이의 노래는 그 거대한 힘에 의해 밀려난 ‘나(왕)’의 고독한 시선을 통해 권력의 무상함과 역사의 아이러니를 노래합니다. ‘인생 만세(Viva la Vida)’라는 노래 제목이 담고 있는 반어적인 울림 속에서, 우리는 광장의 함성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찬가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극의 서곡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두 작품은 함께, 광장에서 모이고 흩어지는 목소리들이 품고 있는 영광과 비애라는 다층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더욱 깊이 사유하게 만드는 훌륭한 거울이 되어줍니다.
광장의 촛불은 꺼지고, 함성은 흩어지며, 우리는 결국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거대했던 ‘우리’는 다시 평범한 ‘나’가 되어 아침의 지하철에 몸을 싣고, 하루의 소소한 걱정거리들과 씨름합니다. 그토록 뜨거웠던 광장의 밤은, 때로는 비현실적인 꿈이나 아득한 과거의 사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위대했던 ‘행위’의 기억과 ‘연대’의 감각은 그저 한겨울 밤의 축제로만 끝나버리는 것일까요?
광장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은 그날의 벅찬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감정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확인했던 ‘시민으로서 함께 설 수 있는 우리’의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가능성은 일상이라는 구체적인 토양 속에서 계속해서 가꾸어 나갈 때에만 진정한 의미를 갖습니다. 거대한 불의에 함께 분노했던 그 마음으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부당함이나 차별에 눈감지 않는 것. 낯선 이의 어깨에 기꺼이 기댔던 그 연대의 마음으로, 일상에서 마주치는 이웃이나 동료,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따뜻한 눈길 한번, 배려의 손길 한번 건네는 것. 이것이 바로 광장의 정치를 일상의 윤리로 가져오는 생활 철학자의 실천입니다.
결국, 진정한 광장은 단지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세워지는, 언제나 깨어있는 시민적 양심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 그리고 더 나은 공동체를 향한 작은 실천들이 모이는 ‘내면의 광장’입니다. 이 내면의 광장을 매일 가꾸어 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광장에서 든 촛불을 일상에서 꺼뜨리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움직이는 작은 촛불이 될 수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위대한 ‘행위’는, 이처럼 일상에서의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삶’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