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익숙한 경적이 멀어지고, 자동차 엔진의 낮은 울음이 잦아들면 비로소 들려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흙을 밟는 내 발자국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 그리고 이 모든 소리를 감싸 안는 거대한 침묵. 숲으로 들어선다는 것은,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잠시 로그아웃하여 침묵이라는 오래된 언어에 접속하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말하고, 듣고, 읽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아갑니다. 스마트폰은 쉴 새 없이 새로운 정보를 밀어 넣고, 관계의 소음은 우리의 감정을 소모시키지요. 하지만 숲의 침묵은 텅 빈 공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수많은 생명의 언어로 가득 찬 충만함에 가깝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사사삭 소리, 오래된 가지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미세하게 뒤틀리는 삐걱- 소리,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물을 길어 올리는 나무의 숨소리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잊고 지냈던, 혹은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침묵의 문법’입니다.
우리는 숲을 볼 때 종종 ‘나무들’이라는 집합 명사로 뭉뚱그려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어떤 나무도 같지 않다는 경이로운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저마다의 가지는 햇빛을 한 뼘이라도 더 받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팔을 뻗었고, 거친 비바람을 견뎌낸 흔적은 구부정한 허리와 깊게 팬 주름으로 남아있습니다.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온몸으로 살아낸 노인의 얼굴 같지 않나요?
독일의 산림학자 페터 볼레벤은 그의 저서 <나무들의 숨겨진 삶>에서 나무들이 땅속 균사체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양분을 나누며, 심지어 어린 나무를 보살피는 ‘어머니 나무’도 존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땅속 세상에서는, 인간의 언어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이타적인 대화가 수백 년에 걸쳐 느리고 깊게 오가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들은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하면서도, 거대한 숲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공존의 지혜를 발휘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익숙했던 낡은 액자를 떼어내고 새로운 ‘철학의 액자’를 걸어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숲을 ‘인간에게 유용한 것’으로 바라보는 데 익숙했습니다. 목재를 제공하는 자원, 휴식을 주는 공원, 아름다운 풍경을 제공하는 배경. 이 모든 것은 철저히 인간의 관점에서 자연을 도구화하는 ‘인간 중심주의’라는 액자 속 그림입니다.
이 낡은 액자를 떼어내는 데 예술은 종종 놀라운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테런스 맬릭 감독의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는 한 가족의 내밀한 삶을 우주의 탄생, 생명의 진화라는 거대한 서사와 교차시킵니다. 카메라는 인물의 얼굴에 머무르다가도 문득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햇살이 부서지는 물결로 시선을 옮겨갑니다. 이는 의도적인 ‘탈중심화’입니다. 인간의 고뇌를 우주적 시간 속에 놓인 한 점으로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삶을 더 큰 생명의 흐름 속에 속한 신비로운 일부로 격상시키는 것이지요.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
영화의 시선이 우리를 거대한 시공간으로 이끈다면, 소리는 우리의 감각을 직접 파고들어 이 철학적 사유를 더욱 깊은 체험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아이슬란드의 밴드 시규어 로스의 음악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음악은 태고의 빙하가 녹는 소리, 밤하늘의 오로라, 화산재 덮인 들판의 침묵을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음향적 풍경화입니다. 특히 그들이 ‘희망어’라는 의미 없는 소리로 노래할 때, 그것은 논리 이전의 감정을 전달하는 원초적 언어가 됩니다. 숲이 우리에게 건네는 ‘침묵의 언어’처럼, 이 소리들은 우리를 인간 세상의 논리로부터 해방시켜 더 크고 원초적인 자연의 질서 속에 잠기게 합니다.
Sigur Rós - 'Svefn G - Englar'
이렇게 영화와 음악은 각기 다른 언어로, 우리를 인간이라는 협소한 무대에서 내려와 자연이라는 광활한 객석에 앉게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이 주연이 아닌, 수많은 생명들과 함께 무대를 채우는 경이로운 존재 중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숲은 우리에게 인간이라는 종(種)의 오만함을 잠시 내려놓으라고 속삭입니다. 끝없는 경쟁과 성취의 압박 속에서 지친 우리에게,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도우며 수백 년을 살아가는 나무들의 방식을 통해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우리를 왜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더 큰 생명의 그물망 속에 연결된 소중한 존재로 느끼게 함으로써 깊은 위안과 소속감을 선물합니다.
문명의 소음이 다시 그리워질 때쯤 숲을 빠져나오며, 우리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파트 화단의 작은 나무 한 그루, 길가의 늙은 가로수에도 저마다의 역사와 이야기가 깃들어 있음을, 그들 역시 침묵의 언어로 우리에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일상으로 돌아온 당신에게, 오늘 스쳐 지나간 공원의 나무 혹은 창밖의 가로수는 어떤 침묵의 언어로 말을 걸고 있었을까요? 그 소리 없는 대화에 귀 기울여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평범한 삶에 ‘생태 철학’이라는 깊고 푸른 액자를 거는 첫걸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