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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오래된 골목길 산책

2부. 도시의 소음과 리듬, 관계와 익명성 사이

by 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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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번잡한 대로를 걷다가, 문득 어떤 이끌림에 순응하듯 좁고 낡은 골목길로 발을 들여놓을 때가 있습니다. 자동차 경적 소리와 분주한 사람들의 발소리는 등 뒤로 멀어지고, 시간의 흐름마저 다른 리듬을 타는 듯한 고요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발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지는 이 공간에서, 우리의 시선은 비로소 정면이 아닌 주변으로 향하며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낡은 시멘트 담벼락의 거친 질감,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붉은 벽돌의 빛깔, 혹은 볕 좋은 창가에서 나른하게 졸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처럼 목적 없이 느리게 걷는 행위는, ‘플라뇌르(Flâneur)’라는 매력적인 개념을 통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플라뇌르’란 본래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당시 파리는 산업화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거대한 유리 아케이드와 백화점이 들어서고, 수많은 익명의 군중이 거리를 채우는 현대적인 대도시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플라뇌르는 바로 이 새로운 도시 환경이 낳은 특별한 인물 유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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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이 플라뇌르에게 예술가의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그에게 플라뇌르는 군중 속에 기꺼이 자신을 내던져 익명으로 존재하면서도, 그 속에서 덧없이 스쳐 지나가는 현대 생활의 순간들로부터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출해 내는 ‘현대성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도시의 모든 단편들, 심지어는 추하고 버려진 것들 속에서도 시적인 영감을 발견하는 예민한 관찰자였지요.


훗날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이 플라뇌르의 모습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읽어냈습니다. 그는 플라뇌르를 도시의 표면에 남겨진 희미한 흔적들을 통해 과거를 읽어내는 ‘도시의 고고학자’이자, 군중 속에서 사건의 단서를 포착하는 ‘거리의 탐정’에 비유했습니다. 또한, 속도와 효율이 최고의 미덕이 된 시대에, 플라뇌르는 의식적으로 ‘느림’을 실천하는 저항가이기도 했습니다.


벤야민이 전한, 19세기 파리의 멋쟁이들이 상점가를 산책할 때 일부러 거북이를 데리고 다니며 그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에 자신의 보폭을 맞추려 했다는 일화는, 속도의 폭력에 맞서 삶의 고유한 리듬을 되찾으려는 이들의 재치 있는 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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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느린 걸음으로 감각이 예민해진 플라뇌르가 오래된 골목길에서 마주하는 것은 새로운 풍경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외부를 향한 ‘발견’인 동시에, 내면을 향한 ‘기억과의 재회’이기도 합니다.


먼저, ‘발견’의 시선은 프랑스의 사진작가 외젠 아제(Eugène Atget)의 작품 세계와 맞닿아 있습니다. 아제는 20세기 초, 근대화의 물결 아래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오래된 파리’의 모습을 평생에 걸쳐 기록한 사진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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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젠 아제




그의 렌즈는 에펠탑이나 개선문과 같은 화려한 기념물이 아니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낡은 골목길, 닳아빠진 가게의 문손잡이, 텅 빈 새벽의 거리, 그리고 이름 없는 행상인들의 모습을 향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버려지고 잊혀가는 것들 속에 도시의 진짜 역사와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제의 사진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종종 가장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것들 속에 숨어 있으며,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천천히, 그리고 깊이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함을 가르쳐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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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골목길 산책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우리의 가장 깊은 ‘기억’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바로 이러한 기억의 신비로운 작동 방식을 섬세하게 탐구했습니다.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의 맛과 향을 통해, 까맣게 잊고 있던 유년 시절의 모든 기억과 감각을 통째로 되살려내는 경이로운 순간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애써 떠올리려 하는 ‘의지적 기억’이 아니라, 특정 감각적 자극에 의해 예기치 않게, 그리고 훨씬 더 생생하게 소환되는 ‘비자발적 기억’입니다. 오래된 골목길은 바로 이러한 비자발적 기억을 깨우는 강력한 감각적 단서들로 가득 찬 공간입니다. 잊고 지냈던 흙냄새, 빛바랜 담벼락의 색깔, 혹은 손끝에 닿는 거친 시멘트의 감촉은 우리 각자에게 숨겨져 있던 ‘마들렌’이 되어, 까맣게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어느 날 오후나 소중했던 사람과의 추억을 눈앞에 생생하게 불러올 수 있습니다.


결국 오래된 골목길 산책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아주고 삶에는 우리가 좇는 것 외에 또 다른 속도와 리듬이 존재함을 온몸으로 일깨워주는 소중한 철학적 실천입니다. 그것은 ‘더 빨리, 더 많이’를 외치는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잠시 귀를 막고,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의 고유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행위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목적지 없이 우리 동네의 골목길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곳에서 우리는 아마도, 가장 일상적인 풍경 속에 숨겨진 가장 빛나는 보석 같은 순간들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순간을 발견하는 기쁨에 반짝이는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우리 각자의 삶이라는 지도 위에 새로운 철학의 오솔길이 그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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