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혹은 유난히 고단했던 하루의 끝, 우리는 때로 무의식적으로 냉장고 문을 열어봅니다. 특별히 찾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습관처럼 손잡이를 당기곤 하지요. ‘윙’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냉장고 안의 차가운 불빛이 어둠을 가르며 얼굴을 비추고, 우리의 시선은 텅 비어 있거나 혹은 먹을 만한 것이 마땅치 않은 선반들 위를 잠시 방황합니다. 순간, 허기를 채우려던 단순한 생리적 욕구는 방향을 잃고 더 근원적인 질문으로 변모하곤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에 굶주려 있는가?”
단지 위장의 허기였다면 물 한 잔이나 간단한 요깃거리로 해결될 일이지만, 냉장고 문을 닫은 뒤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마치 냉장고의 텅 빈 공간이 우리 내면의 결핍감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라도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 텅 빈 냉장고는 그렇게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옵니다. 끝없이 무언가를 욕망하지만 좀처럼 만족을 모르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에 대하여, 그리고 진정으로 우리 삶을 가치 있고 풍요롭게 채워줄 것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이지요. 이 장에서는 바로 이 텅 빈 냉장고 앞에서 시작되는, 결핍과 욕망, 그리고 진정한 ‘채움’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함께 떠나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결핍감은 종종 소셜 미디어가 전시하는 타인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이러한 시대상을 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영국의 드라마 시리즈 <블랙 미러>의 ‘추락(Nosedive)’ 에피소드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별점을 매기고, 그 평점이 곧 사회적 신분과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주인공 레이시는 더 높은 평점을 받아 모두가 선망하는 상류층의 삶에 진입하기 위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이나 생각은 철저히 억누른 채 오직 타인에게 ‘좋아요’를 받을 만한 완벽하고 행복한 모습을 연기하며 살아갑니다. 그녀가 마시는 커피, 그녀가 입는 옷, 그녀가 짓는 미소 하나하나는 모두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치밀한 계산의 산물입니다.
넷플릭스 <블랙 미러> '추락' 편
레이시의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갈망하는 높은 평점은, 오늘날 우리가 소셜 미디어 속에서 집착하는 ‘좋아요’의 수, 팔로워의 숫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녀는 진정한 경험이나 관계를 쌓기보다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미지’를 축적하는 데 온 힘을 쏟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내면은 더욱 공허해지고, 작은 실수 하나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불안에 시달립니다. 이 이야기는 타인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허망하며, 우리를 끝없는 불안과 자기기만으로 몰아넣는지를 섬뜩하게 보여줍니다. 텅 빈 냉장고 앞에서 느끼는 우리의 허전함은, 어쩌면 이처럼 타인의 ‘좋아요’에 굶주려 있는 우리 영혼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끝없는 인정 욕구와 결핍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는 무엇으로 삶을 채워야 할까요?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그의 명저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이 질문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시합니다. 프롬은 인간의 삶의 양식을 크게 두 가지, 즉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으로 나누었습니다.
‘소유 양식’의 삶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삼으려는 태도입니다. 돈, 명예, 지식, 심지어는 사랑이나 경험까지도 ‘내 것’으로 만들어 축적하고 보관하려 합니다. 이러한 삶은 필연적으로 상실에 대한 불안과 더 많이 소유하려는 끝없는 욕망에 시달리게 됩니다. <블랙 미러>의 레이시가 집착했던 높은 평점이야말로, 전형적인 ‘소유 양식’의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존재 양식’의 삶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매 순간을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지식을 소유물처럼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앎의 과정 자체를 즐기고 다른 이와 나누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려 하기보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온전히 경험하고 서로의 성장을 돕는 것. 이것이 바로 ‘존재 양식’의 삶입니다. ‘추락’ 에피소드의 마지막, 모든 평점을 잃고 감옥에 갇힌 레이시가 비로소 옆방의 남자와 아무런 꾸밈없이 서로에게 솔직한 욕설을 퍼부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역설적입니다. 그녀는 사회적인 모든 것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타인과 진실하게 교감하는 ‘존재’의 기쁨을 처음으로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분주한 일상에서 ‘소유’의 유혹에서 한 걸음 벗어나, ‘존재’의 삶을 더 크게 가꾸어 나갈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의외로 거창한 곳이 아닌, 우리 삶의 아주 작은 태도의 변화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먼저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온전히 ‘경험’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점심으로 먹는 김치찌개 한 그릇을 단순히 허기를 때우기 위한 ‘소유물’로 여기는 대신, 그 맛과 향, 따뜻한 온도를 오롯이 느끼는 ‘체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잠시 눈을 떼고,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의 따스함이나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감촉, 귓가에 들려오는 음악의 선율 하나하나에 온전히 집중해 보는 것. 이러한 감각의 회복은 우리를 소유의 세계에서 존재의 세계로 부드럽게 이끌어 주는 가장 손쉬운 문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소비하는 대신 무언가를 ‘창조’해 보는 기쁨을 되찾는 것입니다. 비싼 레스토랑에서 사 먹는 음식 대신, 소박한 재료로나마 직접 한 끼 식사를 정성껏 차려보는 행위. 완성된 제품을 구매하는 대신, 서툰 솜씨로나마 작은 화분을 가꾸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짧은 글 한 편을 써보는 것. 이러한 창조적 활동들은 우리를 수동적인 소비자에서 능동적인 생산자로, 즉 나의 시간과 노력을 통해 세상에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그 결과물은 완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느끼는 몰입과 성취감, 그리고 살아있다는 생생한 감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시선을 물건이 아닌 ‘사람’에게로, 관계의 양이 아닌 ‘깊이’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맥’을 소유하려 애쓰기보다, 단 한 사람이라도 소중한 친구나 가족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며, 함께 웃고 우는 시간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존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며, 이는 그 어떤 소유물도 줄 수 없는 깊은 충만감과 안정감을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결국 텅 빈 냉장고 앞에서 우리가 내려야 할 결단은, 그 안을 더 많은 소유물로 채울 것인가, 아니면 우리 삶 자체를 더 풍요로운 존재의 경험으로 채울 것인가 하는 선택입니다. 진정한 만족은 냉장고의 크기나 그 안의 내용물이 아니라, 소박한 재료만으로도 맛있는 한 끼를 만들어 사랑하는 이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존재’의 능력에 달려있을지 모릅니다.
다음번에 무심코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그 텅 빈 공간에 마음이 허전해진다면, 잠시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나는 지금, 무엇을 더 ‘소유’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어떻게 더 깊이 ‘존재’하고 싶은 걸까?” 그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 속에, 우리 삶을 진정으로 채울 수 있는 지혜가 숨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