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이는 지하철 객차 안, 대부분의 시선은 저마다의 손안에 들린 작은 스마트폰 화면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각자의 액정 속 세계에 몰입한 이 풍경은 현대 도시 생활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이 기묘한 동행 속에서 우리는 가장 가까이 있는 타인에게 가장 무관심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익명성의 가면 뒤에서야 비로소 가장 자유로운 자신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움직이는 철의 방주, 지하철 안에서 우리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우리 마음의 풍경은 또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을까요?
이러한 ‘서로에 대한 무관심’은 어쩌면 도시의 밀도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기제일 수 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은 일찍이 <대도시와 정신생활>에서 이러한 도시인의 심리 상태를 ‘둔감함(blasé attitud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대도시는 수많은 사람, 사물, 사건들로 끊임없이 우리의 신경을 자극합니다. 이러한 과도한 자극에 일일이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면 개인은 쉬이 지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도시인은 일종의 자기 보호 전략으로 감정의 안테나를 접고, 외부 자극에 대해 다소 무뎌지고 무관심해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지요. 이 ‘둔감함’은 수많은 익명의 타인과 함께 부대껴야 하는 지하철이라는 공간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각자의 내면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어쩌면 필수적인 생존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이 둔감함의 막을 뚫고, 때로는 스쳐 지나가는 타인을 향해 찰나의 연민이나 불편함 같은 강렬한 감정이 예고 없이 스며들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익명성의 외투를 걸치고 있어도, 타인과 감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인간임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증거입니다.
지하철은 또한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차별’의 단면을 드러내는 무대이기도 합니다.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 <삼등 열차>가 당시 소외된 서민들의 고된 삶을 화폭에 담아 그 존재를 환기했듯이, 오늘날 지하철에서도 특정 외양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거나 외면하는 미묘한 시선들이 존재합니다.
오노레 도미에 <삼등열차>, 1862
또한 지하철은 마치 살아있는 박물관처럼,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세대 간의 풍경’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곤 합니다. 한쪽에서는 종이 신문을 펼쳐 든 채 느긋하게 세상을 읽는 노신사의 모습이, 다른 한쪽에서는 최신형 이어폰을 끼고 빠르게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는 젊은이의 분주한 손길이 교차합니다. 때로는 큰 소리로 통화하는 어르신의 모습에 젊은 승객들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하고, 반대로 공공장소에서의 에티켓에 무심한 듯한 젊은 세대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는 어르신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목격됩니다. 이러한 사소한 풍경들은 단순한 개인의 취향이나 성향의 차이를 넘어, 각 세대가 경험해 온 역사적 배경과 사회 문화적 환경이 어떻게 그들의 가치관과 생활양식, 심지어는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에까지 깊이 스며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초가 됩니다.
급격한 사회 변화와 기술의 발전은 세대 간의 경험의 폭을 더욱 넓혔고, 그로 인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다름’으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다름’이 반드시 ‘틀림’이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하철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우리는 불편한 시선 대신, 서로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그 다름 속에서 우리 사회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발견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져볼 수는 없을까요? 각 세대가 지닌 고유한 지혜와 경험은 어쩌면 서로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지하철 여정은 때로 예기치 않은 멈춤과 지연으로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대에 올리기도 합니다. 목적지를 향해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한다는 현대인의 강박적인 시간관념은, 이렇게 갑자기 멈춰버린 시간 앞에서 쉽게 조바심과 짜증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이 ‘죽은 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우리가 시계로 측정하는 균일하고 양적인 시간(temps)과 우리의 의식 속에서 생생하게 경험되는 질적이고 주관적인 시간, 즉 ‘지속(la durée)’을 구분했습니다. 지하철이 멈춰 선 순간, 객관적인 ‘시계 시간’은 마치 정지한 듯 우리를 답답하게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우리의 내면에서는 이 ‘지속’으로서의 시간이 특별한 방식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분주함에 쫓겨 미처 느끼지 못했던 시간의 더딘 흐름, 그 속에서 떠오르는 다양한 생각과 감각들, 혹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의 미세한 변화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지속’의 시간을 단지 견뎌내야 할 공백으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일상의 빠른 속도에서 잠시 벗어나 삶의 다른 결, 다른 리듬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로 삼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어쩌면 이 멈춤은, 우리에게 삶의 표면 아래 흐르는 더 깊고 풍요로운 시간의 층위를 발견하라는 초대일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 우리는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사유하며, 뜻밖의 창조적 영감을 얻거나 내면의 평화를 경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차가운 익명성의 공간처럼 보이는 지하철에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느슨한 연대’의 순간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갑작스러운 열차의 흔들림에 서로를 붙잡아주거나, 누군가 떨어뜨린 물건을 함께 주워주는 사소한 행동들 속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타인과 따뜻한 연결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순간들은 우리가 서로에게 완전히 무관심한 존재만은 아니며,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보이지 않는 공동체의 일원임을 느끼게 합니다. 비록 일회적이고 짧은 만남일지라도, 그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작은 배려를 주고받으며 인간적인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지하철이라는 일상적 공간은, 우리가 어떤 ‘마음의 창’으로, 어떤 ‘철학의 액자’를 걸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곳은 때로 고독과 소외, 차별과 단절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 존재의 다양성과 삶의 예측 불가능한 단면들, 그리고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작은 연대의 가능성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성찰할 수 있는 생생한 교실이기도 합니다. 다음번 지하철에 오를 때,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우리 시대의 또 다른 표정과 그 안의 작은 온기를 발견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평범한 공간조차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한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