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한 바람에 비 냄새가 살짝 섞여 코끝이 간지러운 유월이에요. 3년 전 이태원에서의 그날이 없었다면, 오늘이 상은 씨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이라지요.
그곳에서 상은 씨는 여전히 스물다섯, 가장 찬란했던 모습 그대로일 텐데 이곳에서 살아남은, 남겨진 우리는 속절없이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하며 망각의 강을 조금씩 건너고 있네요.
오늘도 상은 씨 부모님께서 사람들을 초대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김치찌개를 끓여내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딸이 생전에 나누고자 했던 그 선한 마음을 이어가기 위해 매해 딸의 생일을 맞아 식사를 나누는 그 모습. 그건 상은 씨를 추모하기 위함뿐 아니라 국가가 애써 외면하고 지우려 했던 당신의 존재와 당신의 삶이 가졌던 의미를 조용하고도 강력하게 증명하는 행위일 겁니다.
“우리 딸 상은이의 빈 의자를 바라보며 얼마나 통곡을 했는지 모른다”라는 아버님의 편지를 읽으며 무너져 내리는 심장을 붙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슬픔을 파괴적인 감정으로 가두지 않고 다시 세상과 나누는 그 위대함 앞에 저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상은 씨, 저는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분노와 공포, 무력감에 온몸이 떨립니다. 당신의 죽음은 결코 예측 불가능한 ‘사고’가 아니었어요. 명백한 위험 신호가 있었음에도 모두가 외면한, 예견된 ‘재앙’이었죠.
참사 몇 시간 전부터 “압사당할 것 같다”는 절박한 신고가 빗발쳤지만, 지휘부라는 사람들은 그저 “용인할 수 있는 불편 신고” 정도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10만 인파가 몰릴 것이 뻔한 그곳에 고작 137명의 경찰을, 그것도 군중 통제가 아닌 마약 단속 같은 엉뚱한 일에 집중시켰다는 사실을 상은 씨의 가족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대통령 경호나 정치 집회에 동원되는 인력을 생각하면, 우리의 안전은 그들의 우선순위에서 얼마나 뒤에 있었던 건지 처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 참사가 벌어진 직후에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던 대한민국 재난 대응 매뉴얼은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했지요. 현장을 지휘하는 사람은 없고, 중증도 분류 같은 가장 기본적인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훈련된 구조인력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뒤엉켜 CPR을 해야 했던 그 아비규환 속에서 상은 씨는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웠을까요.
살아남은 우리를 더욱 참담하게 만든 것은 그 이후의 일들이었습니다. 국가는 당신의 죽음 앞에서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교묘한 언어들을 동원했죠.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바꾸라는 정부의 대응과 지침을 기억합니다. ‘희생자’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국가의 과실이라는 뉘앙스를 지우고, 그저 사고로 인한 불운한 죽음으로 축소시키려 했던 겁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그 단어들이 갖는 정치적 폭발력을 학습한 정부의 비겁한 자기 방어였죠.
이태원 사고 사망자 (X), 이태원 참사 희생자 (O) / 희생자 위패도, 영정 사진도 없었던 윤석열 정부 합동분향소.
윤석열 정부가 공무원들에게 '근조(謹弔)' 문구가 없는 검은 리본을 달라는 지침을 내렸다.
전국에 설치된 합동분향소에는 상은 씨와 참사 희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오르지 못했습니다. 159라는 ‘숫자’는 관리할 수 있지만, 각기 다른 이름과 사연을 가진 159명의 ‘얼굴’은 그 자체로 국가를 향한 고발이 되기에 두려웠던 거죠. 그 텅 빈 제단은 슬픔의 본질을 거세하고, 국가가 통제하는 ‘형식’만 남기려는 ‘공허한 애도’의 강요였습니다. 당신의 죽음이 우리 모두의 슬픔이자 분노가 되는 것을 막고, 정치적으로 ‘애도 불가능한 삶’으로 만들려는 잔인한 시도였습니다. 우리는 분노할 권리는커녕 애도할 권리마저 빼앗겼습니다.
시간이 흘러 법의 심판이 시작됐지만, 그 역시 우리에게 더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현장 지휘관은 유죄를 받았지만, 정작 더 큰 권한과 책임을 지닌 경찰 최고 지휘부와 용산구청장은 1심에서 줄줄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구체적인 위험을 예견할 수 없었다’는 판결 요지를 들으며, 우리는 권한이 클수록 책임에서 멀어지는 ‘책임의 역설’ 앞에 또 한 번 절망했습니다. 이건 8년 전 세월호 재판에서 우리가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역사가 결국 또 다른 비극을 낳은 필연적 귀결 앞에서 우리는 또다시 고개를 떨궜습니다.
상은 씨는 미국 공인회계사 시험 좌절 후 “실패를 딛고 성장하겠다”라며 환히 웃었다죠. 그리고 당신은 재도전 끝에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후 당신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사 이틀 후, 당신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한 회사에서 합격 문자가 날아왔지만, 당신은 출근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상은 씨, 우리 역시 이 절망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상은 씨 부모님을 비롯한 유가족들의 삭발과 오체투지, 시민들의 끊임없는 외침이 모여 마침내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힘들게 특별법이 제정된 후에도 윤석열 정부는 특별조사위원회 출범을 막았지만, 참사 2년 7개월 만인 얼마 전, 드디어 독립적인 특별조사위원회가 공식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죽음을 외면하고 진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던 한 국가의 지도자를 파면하고 새로운 정권을 세운 뒤에야 이뤄진 일입니다. 우리는 이제, 국가가 감추려 했던 진실을 파헤치고, 국가의 공식 기록에 맞서는 ‘희생자의 역사’를 써 내려가려고 합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오랜 시간, 온 몸으로 물었다.
상은 씨.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저는 당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매일 고민합니다. 당신의 부모님께서 나누는 그 밥 한 그릇의 의미를 되새기며, 슬픔을 연대로, 기억을 행동으로 바꾸는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진정한 추모는 당신의 이름과 얼굴을 잊지 않는 것을 넘어,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과정 속에서만 완성될 테니까요.
다시는 ‘국민의 안전’이 비용 문제로 치부되지 않고, 권력을 가진 자가 책임에서 멀어지는 ‘면죄부의 문화’가 당연시되지 않으며, 국가가 시민의 ‘애도할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살아남은 제가, 우리가 끝까지 싸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