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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의 거울: 희극으로 끝난 저항의 비극

이미지 정치의 무대에서 길을 잃은 어느 보수주의자의 초상.

by 조하나


채플린의 시선으로 본 정치라는 무대


희극의 왕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말했다. 이보다 대한민국 현대 정치를 꿰뚫는 통찰은 드물다. 특히 모든 것이 이미지로 소비되는 '정치라는 무대'는 이 명제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공간이다.


무대 위 정치인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비장한 '비극'의 클로즈업으로 연기한다. 스스로를 '원칙 있는 정치적 저항'의 투사로 내세우고, '지적 경고'를 하는 예언자로 분하며, 관객이 자신의 진지한 고뇌에 몰입해 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관객석에서 그 무대를 멀찍이 '희극'의 롱숏으로 바라볼 때, 풍경은 사뭇 달라진다. 과장된 몸짓, 어설픈 소품, 맥락과 어긋난 대사들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은 진지함 대신 실소를 자아낸다. 비극으로 기획된 연극이 배우의 의도와 달리 한 편의 부조리극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텅 빈 기호들의 향연: '럭셔리 캠핑'이라는 이름의 부조리극


최근 나경원 의원이 연출한 장면들은 바로 이 '정치적 희비극'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정치적 농성'은 본디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쳐 대의의 절박함을 호소하는 처절한 언어이다. 그것은 안락함과 일상을 내던지고,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부조리한 현실에 균열을 내려는 비장한 행위이다.


12.3 내란 사태, 지난 6개월 간 눈 내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밤을 새우는 시민들의 모습은 바로 그 원형적 힘을 증명한다. 통제 불가능한 자연의 시련 앞에서 그들의 저항은 연출이 아닌 ‘실재’하는 고난으로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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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경원 의원이 국회 로텐더홀에 펼친 '텐트'는 이 모든 저항의 문법을 스스로 파괴하는 기호학적 재앙이었다. 이는 '의도된 프레임이 처참하게 실패'한 교과서적 사례다. 쾌적한 실내, 고급 캠핑 텐트, 과장되고 부자연스러운 미소. 이 모든 시각적 기호들은 '투쟁'과 '고난'이라는 메시지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기호학적 비일관성'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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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이미 이미지의 행간을 직관적으로 읽어낸다. '안락한 캠핑'이라는 이미지가 '정치적 농성'이라는 본질을 압도하는 순간, 대중은 그 의도된 프레임의 허구성을 간파하고 '럭셔리 캠핑', '화보 촬영'이라는 조롱 섞인 역프레임을 씌워버렸다. 이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주류 보수 정치가 얼마나 대중의 감성과 시대의 언어로부터 유리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기 폭로이다. 그들은 '저항'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도, 그 단어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진정성, 즉 '희생'의 기호학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거울이 된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아이러니


텐트 농성을 하면서 나경원 의원은 두 번째 프레임 전략을 구사한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명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손에 들고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는 단순한 독서 행위를 넘어, "나의 비판은 정파적 비방이 아닌, 학술적 권위에 기반한 이성적 경고"라는 프레임을 구축하려는 고도의 전략, 즉 '신뢰도 아웃소싱'이다. 그녀는 책이 제시하는 '잠재적 독재자 감별법'이라는 체크리스트를 통해 경쟁자인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을 민주주의의 파괴자로 낙인찍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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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영리해 보이는 전략은 치명적인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 책은 나경원 의원에게 무기가 아니라 거울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이 책이 민주주의 쇠퇴의 핵심 징후로 지적하는 '민주주의 규범의 거부', '경쟁자의 존재 부정', '헌법적 강경 태도' 등은 지난 몇 년간 윤석열 정부와 집권여당이었던 국민의힘이 비판받아온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이 제스처가 행해진 정치적 맥락이다. 나경원 의원이 속한 정치 진영의 수장이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은, 책이 경고하는 교묘한 규범 파괴를 넘어 '불법 비상계엄'이라는 가장 노골적이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독재자 체크리스트'에 이보다 더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 결국 "저들을 보라"며 치켜든 거울 속에는, 바로 자신의 진영과 자기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 부메랑이다.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빌려온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도 적용되기 마련이다. 나경원 의원의 행위는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데 성공하기는커녕, 한국 정치 전반에 걸친 민주주의 규범의 상호적 붕괴라는 냉혹한 현실을 대중 앞에 드러내고,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냉소적인 정치적 술책에 불과했는지를 자인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막이 내린 뒤, 텅 빈 무대에 남은 것


나경원 의원은 '애국 보수'를 참칭 하는 정치인의 비극적 단면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진정성을 연기하려다 실패하고, 지적인 권위를 빌려오려다 위선만 폭로당한 대한민국 보수주의자의 초상이다.


진정한 권위와 신뢰는 연출된 이미지나 빌려온 지식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정직한 응시, 일관된 언행, 그리고 대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진정성 있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나경원 의원을 통해 저항의 언어를 잃고 진정성의 문법을 망각한 채, 공허한 이미지의 유희에만 몰두하는 이 시대 일부 정치 세력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반대 진영의 공격이 아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대중의 차가운 시선과, 스스로를 비추는 정직한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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