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대령의 무죄 확정과 직무 복귀,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 사람의 길이 때로는 시대의 표정이 되고, 그의 침묵과 외침이 공동체의 가장 깊은 균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2023년 7월, 해병대 채 상병의 비극적인 순직과 그 진실의 행방을 쫓던 박정훈 대령의 여정은, 한 군인의 법적 투쟁을 넘어 우리 사회의 영혼에 아로새겨진 하나의 서사시가 되었다.
박정훈 대령의 손에 들린 수사 기록이 법과 원칙을 향한 나침반이었을 때, 군통수권자와 해병대 사령관, 그리고 모든 조직은 그것을 ‘항명’이라는 낙인으로 되갚아주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이유로 한 개인이 ‘불복종’이라는 범죄의 주모자로 내몰리는 시스템적 모순,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숭고함과 그를 둘러싼 세계의 비정함을 동시에 목도한다.
12.3 불법 비상계엄 선포 이후, 우리 모두 혹독한 겨울을 버티던 지난 1월(이 때는 내란수괴 윤석열의 체포 및 구속, 탄핵 모두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박정훈 대령의 1심 판결일, 10만이 넘는 탄원서와 함께 그의 곁을 지키기 위해 모인 시민들의 손에 들렸던 ‘붉은 장미’를 기억한다. 그것은 해병대의 상징색을 넘어, 불의에 맞서는 가장 뜨거운 ‘투쟁’의 언어였다.
제도가 개인을 처벌하려 할 때, 이름 없는 다수는 그 숭고한 행위의 본질적 정의로움을 꿰뚫어 보고 기꺼이 그의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토록 장엄한 연대의 풍경 뒤편으로, 우리는 어째서 정의를 향한 길이 이토록 고독하고 험난한 희생을 요구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1심에서 박정훈 대령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며칠 후 곧바로 군검찰이 이에 항소했다. 박 대령의 1심 무죄 판결은 기적 같은 승리였지만, 그 승리가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 일뿐이라는 씁쓸한 진실을 우리는 또다시 확인한 것이다.
국방부는 1심 재판부의 무죄 판결 이후에도 군검찰이 항소했기 때문에 박정훈 대령을 원래 자리로 복직시키는 건 어렵다고 했다. 채 상병 순직 사건 이후, 박정훈 대령은 지금까지 텅 빈 사무실에 출근해 벽만 보다 퇴근했다. 아무도 그와 말을 섞지 않았고, 조직 대부분 그를 ‘돈키호테’처럼 대했다.
정권이 바뀌고 채 해병 특검이 출범하고서야 2025년 7월 9일, 마침내 박정훈 대령에 대한 항소가 취하됐다. 그리고 다음 날인 7월 10일, 박정훈 대령은 해병대 수사단으로 직무 복귀했다. 채 해병이 순직한 지 꽉 채워 2년 만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같은 날 내란 수괴 윤석열은 넉 달만에 재구속됐다. 제자리에 있었어야 할 것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다. 결국 이긴 사람은 없고, 모두에게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가 남았다.
역시 같은 날, 윤석열 재구속 당일 오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 조은희 의원이 "결과적으로 우리도 12.3 계엄의 피해자"라고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만약 12.3 내란이 성공했다면 지금 저들은 얼마나 커다란 꿀단지를 안고 배를 까고 누워 좋아했을까.
21세기 선진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국가 수장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세력은 여전히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독재' '국민' '민주주의'라는 말을 감히 입에 올리며, 내란 전이나 이후나 변함없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산다. 내란이 실패했어도 국민의힘은 여전히 국회의원이다. 그러나 내란이 성공했다면, 민주당 의원들은 목숨을 내놨어야 했다. 당시 야당은 12.3 내란 이후 윤석열의 2차, 3차 계엄 선포에 대비해 몇 달 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국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생활했다.
이재명 지지자들이 대선에 졌다면, 김문수 정권 아래 언제 또다시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할지 모르는 불안과 혐오 문화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며 태극기와 성조기로 광장을 오염시킨 세력들이 하나둘 장관과 정부요직에 앉는 걸 봐야 했을 것이다. 경제는 더욱더 파탄에 이르고 노동자들은 부서져 이 나라는 끝내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김문수 지지자들은 대선에 져도 이재명이 대통령이다.
국민의힘이 여전히 절박하지 않은 이유는 12.3 내란을 계기로 민주당 의원들은 삶과 죽음, 말 그대로 실존의 위기에 처했던 것에 비해 그들은 삼시 세끼 메뉴의 변화 정도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툭하면 '정의와 상식, 공정'을 외치는 소위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은 왜 국민의힘의 부역질엔 이토록 관대한지, 채 해병 특검법을 수차례 반대하고 표결 자체를 거부한 국민의힘이 왜 '청년'과 '자유'를 말하도록 마이크를 주는 것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분명, 우리 사회는 지금, 단단히 잘못됐다.
“고발은 짧지만, 고통은 길다”는 말이 있다. 이 땅의 수많은 내부고발자들, 양심과 정의를 따른 ‘의로운 이방인’들의 삶을 관통하는 저주와도 같다. 권력을 가진 조직의 ‘보복’은 단지 ‘해고’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삶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집요하고 다면적인 과정이다. 조직은 내부고발자를 가장 먼저 중요 업무에서 배제하여 ‘직업적으로 말살’하고,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어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며, 막대한 자원을 동원한 소송으로 ‘법적·경제적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이 모든 보복의 정점에는, 가장 잔인하고 효과적인 무기인 ‘심리적 외상과 자아의 붕괴’가 있다. 우울증, 불안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이 끔찍한 과정의 부산물이 아니라, 보복의 핵심 목표이다.
의롭고 외로운 이들의 진짜 고통은 내부고발이나 양심적 선택에 대한 불이익, 그 자체가 아니다. 정의를 수호해야 할 시스템과 한때는 운명 공동체라 믿었던 동료들에게서 배신당했다는 경험, 공정성과 신뢰라는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의 영혼은 무너져 내린다.
한국의 법은 보복이 일어난 ‘후’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데 집중하지만, 고발자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말살당하는 ‘과정’, 그 자체다. 우리의 제도는 치명상에 작은 반창고를 붙여줄 뿐, 파괴를 막거나 그 파괴를 상쇄할 신뢰할 만한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더 깊은 곳에는 보이지 않는 문화의 힘이 도사리고 있다. 한국 사회는 내부고발 행위를 추상적으로는 ‘정의롭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행위를 한 ‘사람’은 ‘화합을 깨는 존재’로 인식하는 모순 속에 갇혔다. 조직의 화합과 의리를 개인의 이견보다 중시하는 강력한 집단주의 문화, 그리고 조직에 대한 ‘충성(忠)’과 사회적 ‘정의(義)’가 충돌할 때 관습적으로 ‘충(忠)’을 우선시해 온 유교적 가치의 오랜 메아리가 그 배경에 있다. 내부고발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관계의 ‘충(忠)’보다 더 높은 가치인 ‘의(義)’를 택한 사람이며, 그로 인해 공동체의 불문율을 깬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나아가 이는 문화를 넘어, 집단의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를 식별하고 추방하려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도 맞닿아 있다. 내부고발자는 집단의 규범을 어기고 리더십에 도전함으로써, 우리의 뇌에 깊이 각인된 ‘위협 감지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그에게 가해지는 극심한 보복은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위협적인 개인을 집단에서 제거하여 안정을 되찾으려는 방어적 공격이자, 다른 구성원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경고가 된다.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가 ‘소프트웨어’로서 화합과 충성이 가장 신성한 규범이라고 정의하면, 배척의 본능이라는 ‘하드웨어’가 작동하여 죄의 경중을 훨씬 뛰어넘는 감정적이고 잔인한 축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더 이상 ‘외로운 영웅’이나 ‘의로운 순교자’의 희생에 기대지 않는 사회를 우리는 기대할 수 있는가.
법의 방패를 현실적으로 강화하고, 해외 선진국 사례처럼 내부고발의 동기 구조를 바꾸는 혁신적인 보상 체계를 도입하며, 장기적인 생계와 심리적 치유, 재기를 돕는 ‘전환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법과 제도의 개혁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두려움의 문화’를 바꾸는 데 있다. 리더가 먼저 실패와 이견을 학습의 기회로 재정의하고, 용기 내어 말해준 구성원에게 “고맙다”라고 진심으로 반응할 때, 조직의 기본 반응은 ‘처벌’에서 ‘학습’으로 전환될 수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이러한 ‘심리적 안전감’이 없다. 공동체 구성원 간의 서로에 대한 신뢰도도, 사회에 대한 신뢰도도 모두 바닥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샌드박스가 되어주지 못한다. 잔뜩 가시 돋은 고슴도치들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는 ‘충성’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한다. 진정한 충성은 맹목적인 순종이나 부끄러운 결함의 은폐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조직과 공동체가 스스로 내세운 가장 높은 이상에 부합하도록, 기꺼이 책임을 묻는 용기 있는 행동이다.
우리는 모두 이 진실을 온전히 끌어안아야 한다. 그래야 내부고발자가 배신자가 아닌 가장 충성스러운 구성원이자 시대의 양심으로 이 사회에서 바로 설 수 있다. 한 사람의 의로운 숭고함이 더 이상 안타까움이나 비극이 되지 않는 사회, 박정훈 대령의 손에 들린 것이 항명의 증거가 아닌 ‘궁극의 애국과 충성’으로 인정받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붉은 장미를 들었던 시민들의 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