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말과 태도는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21대 대통령 이재명의 언어, 특히 그의 ‘질문법’은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을 상징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대통령 후보 시절, 강원도의 왁자지껄한 시장 한복판이었다. 이재명 당시 대선 후보는 한 소상공인이 파는 음식을 옆에 서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때 한 이십 대 청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가와 말했다. “후보님, 시골에 들어와 살려는 젊은이들에게 혜택과 지원을 좀 해주세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 가슴팍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냈다. 그리고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되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걸, 어떻게 지원해 줬으면 좋겠습니까?”
순간, 청년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저… 어… 그러니까… 그게….” 그는 말끝을 흐렸다. 어쩌면 그 청년은 다른 정치인들처럼 “네, 잘 알겠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같은 의례적인 답변을 기대했으리라.
하지만 이재명은 그 자리에서 청년에게 ‘똑똑한 시민으로 권리 찾는 법’에 대한 즉석 강의를 펼쳤다. 주권을 가진 국민이 공직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인데, 이왕이면 아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동네 버스가 잘 안 다니니, 정류장을 몇 개 더 만들어 주세요’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막연하게 ‘잘해달라’고만 하면, 정치인들이 예산을 엉뚱한 데 써버리고도 생색만 내기 딱 좋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요구해야 나중에 결과가 제대로 나왔는지, 만족할 만한지 평가할 수 있고, 그래야 공무원들이 딴짓을 못 한다는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청년에게, 그는 웃으며 숙제를 내준다. 오늘 집에 돌아가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도시를 떠나 시골에 들어온 청년의 입장에서, 당장 무엇이 어떻게 바뀌면 당신의 삶이 직접적으로 나아질지. 그리고 내일 이 번호로 연락해서 이야기하라고.그 장면을 보며, 나는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가 될 거라 확신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도 그 모습은 다르지 않았다. 증권거래소 직원들과의 타운홀 미팅에서 또다시 ‘지원과 혜택’이라는 뭉툭한 단어로 도움을 청한 직원에게, 그는 어김없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단순한 말버릇의 문제가 아니다. 그의 질문은 안개처럼 모호한 언어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던 우리 사회의 오랜 관성을 정면으로 깨부순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권위'라는 성채에, '실용'이라는 날카로운 정(釘)으로 균열을 내는 것이다.
그의 ‘정’이 부딪히는 벽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한 ‘침묵의 카르텔’이다. 윗사람의 뜻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유교적 위계질서, “까라면 깐다”는 식의 군대식 상명하복 문화, 그리고 ‘왜?’라고 묻기보다 정답 암기만을 강요해 온 주입식 교육. 이 세 가지가 단단하게 결합해, 우리는 어느새 질문하는 법을 잊고 구체적인 대안을 고민하는 근육을 잃어버렸다.
바로 이 오래되고 고질적인 침묵을 향해, 이재명 대통령은 자신만의 언어를 무기 삼아 다가선다. 그의 언어는 ‘민족중흥’ 같은 뜬구름 잡는 단어들로 하늘을 맴돌지 않는다. “먹고 싶은 과일 한 개 못 사 먹는” 보통 사람의 삶, “가족들 데리고 소고기 한번 실컷 먹어보는” 소박한 꿈의 지평으로 정치를 끌어내린다. “이념이 밥 먹여 주냐?”는 그의 도발은, 실용주의라는 메스로 기존 정치의 환부를 도려낸다. “시멘트, 자갈, 모래를 섞어야 콘크리트가 된다”는 그의 비유는, 복잡한 정책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번역해 낸다. 이토록 땅에 발을 붙이고 우리와 가까운 언어를 쓰는 지도자를, 우리는 참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그는 “통합은 유능함의 지표이며, 분열은 무능의 결과이다. 국민 삶을 바꿀 실력도 의지도 없는 정치 세력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을 편 가르고 혐오를 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껏 나는 그 어떤 정치인과 지도자에게서도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조그마한 땅덩이, 그마저도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가 젠더, 세대, 계층 등으로 갈갈이 찢긴 이유는 갈등과 분노, 두려움, 공포심을 조장해 플레이어들이 서로를 죽여야 살 수 있는 것처럼 가스라이팅 해 '오징어 게임' 판을 깔고 커튼 뒤에서 가면을 쓰고 샴페인을 홀짝 대며 이를 즐기는 소수의 VIP들 때문이다.
이재명은 사회 공동체의 갈등 현상의 원인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이제껏 문제를 해결할 노력도 의지도 관심도 없던, 심지어 모른 척하던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다. 원인을 제대로 짚었으니 해결책을 제시해 성공적으로 실행하기까지 그의 정부를 단단히 째려볼 테다.
이재명의 언어는 투쟁의 기술인 동시에, 잠들어 있던 사회를 깨운다. 명분과 관념의 유희에 빠져 정작 삶의 문제를 외면해 온 ‘똑똑한 바보들’의 사회는, 그의 구체적이고 집요한 질문 앞에서 당황하고 흔들리며 무력해진다.
그러나 그 당혹감은 건강한 균열의 시작이다. 이재명의 질문법은 모호함 뒤에 숨어 책임을 미루던 안일함을 더는 용납하지 않으며, 오직 ‘답을 도출하기 위한 토론’이라는 실용적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그가 던지는 날카로운 ‘정(釘)’이 우리 사회의 굳은 머리와 잠든 양심을 깨워, 마침내 어떤 격렬하고 생생한 토론을 만들어 낼지, 그리하여 마침내 어떤 실용적인 해답들을 길어 올릴지,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 신선한 충격이 몰고 올 미래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