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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나비효과

이 시대 사람의 목숨값은 얼마인가.

by 조하나



2025년 7월의 그날, 텍사스 힐 컨트리의 여름은 짙푸른 녹음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독립기념일 연휴를 맞아 과달루페 강변의 ‘캠프 미스틱’은 여느 때처럼 활기 넘쳤다. 그러나 단 몇 시간 만에 모든 것이 변했다. 4개월 치의 비가 한꺼번에 쏟아졌고, 강물은 45분 만에 8미터나 치솟아 어둠 속에서 잠든 캠프를 덮쳤다. 주택과 자동차, 통나무집이 장난감처럼 떠내려갔고, 그 자리에는 매트리스와 냉장고, 그리고 미처 주인을 찾지 못한 개인 소지품들이 뒤엉킨 거대한 잔해만 남았다. 이 참사로 (7월 11일 기준) 최소 121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 27명은 캠프에 참가했던 어린 소녀들과 그들을 돌보던 상담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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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끔찍한 비극은 과연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였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신념과 선택이 빚어낸 ‘인재’였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한 마리 작은 나비가 날아온 궤적을 따라가다 만난 워싱턴 D.C.의 한 문서, ‘프로젝트 2025’라는 이름의 설계도를 펼쳐 봤다. ‘이념’이라는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내려진 작은 결정들을 통해 어떻게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강가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그 경로를 되짚어 보아야 하는 것이다.









텅 빈 의자 하나가 만든 비극



놀랍게도, 미국 국립기상청(NWS)은 이번 폭풍의 위력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재난 발생 수 시간 전, 가장 높은 등급의 경고인 ‘돌발 홍수 비상사태’를 발령하며 주민들의 즉각적인 대피를 촉구했다. 과학자들은 나름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에서 조기경보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폭우가 쏟아지던 당시 약 700명의 소녀들이 과달루페 강의 범람원으로 알려진 곳에 머물고 있었다. 캠프 미스틱에서 조기 경보 시스템이 제때 작동하지 않았고 적절한 대피 수단도 확보하지 못했다.


또한, 이 지역 사무소에는 ‘경보 조정 기상전문가(WCM)’라는 중요한 직책이 몇 달째 비어 있었다. 그는 기상청의 전문적인 예보를 지역 공무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고, 위험의 심각성을 설득하여 주민 대피와 같은 실제 조치를 이끌어 내는, 말 그대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였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시선에서 그는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예산을 축내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트럼프 정부의 대대적인 연방 공무원 감축 정책으로 그가 떠난 후, 그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 텅 빈 의자 하나가, 과학의 경고와 인명 구조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린 것이다.










위험한 신념의 이름, ‘작은 정부’



애초에 국가는 왜 스스로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선택을 했을까? 텍사스의 그 텅 빈 의자는 단순한 결원이 아니라, 거대한 정치적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었다.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이 설계한 ‘프로젝트 2025’의 철학은 바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작은 정부’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연방 공무원과 예산을 대대적으로 감축한 데에는 몇 가지 핵심적인 노림수가 있었다.




‘행정 국가’의 해체라는 ‘이념’적 목표


이들은 대통령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관료 조직, 이른바 ‘딥 스테이트(Deep State)’가 국가를 좌지우지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수만 명의 연방 공무원을 해고하고 그 자리를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인물들로 채움으로써, 행정부 전체를 확실히 장악하려 했다. 이는 정부를 ‘효율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들이 진짜 노린 건 국가 시스템을 무력화하고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낭비’ 프레임을 통한 핵심 프로그램 폐지


재난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기에 그에 대한 대비는 결코 '낭비'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재난을 ‘예방’하기 위해 홍수 방벽 등을 짓는 데 투자했던 ‘회복력 있는 인프라 및 지역사회 구축(BRIC)’ 프로그램은 ‘효율’이라는 명분 아래 “낭비적이고 정치적 의제에 치우쳤다”라는 이유로 트럼프 정부에서 전격 폐지되었다. 당장의 지출을 줄여 감세의 명분을 쌓고, 지지층에게 매력적으로 들리는 ‘낭비’ 프레임으로 지지층을 설득하는 정치적 계산이었다.




기후 변화와의 전쟁


특히 국립해양대기청(NOAA) 같은 과학 기관은 트럼프 정부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 프로젝트 2025는 NOAA를 ‘기후 변화 경보 산업’이라고 폄하하며 기관의 해체와 축소를 권고했다. 트럼프는 이미 여러 차례 “기후 변화를 주장하는 건 민주당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의 기만과 사기”라고 밝혔다. 기후 변화를 연구하고 경고하는 것 자체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과학 기관의 입에 재갈을 물린 것이다.










스스로를 옥죄는 신념의 역설, 텍사스



이 홍수 참사가 더욱 아이러니로 다가오는 이유는 재앙의 무대가 바로 텍사스였기 때문이다. 텍사스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자원이 풍부한 주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정치 지도자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작은 정부’와 ‘주의 독립적 권리’, 연방 정부에 대한 불신을 외쳐온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자들이다.


그들은 연방 정부의 규제와 예산 지원을 비판하며 스스로의 힘을 강조했지만, 이번 홍수 앞에서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필사적으로 손을 내민 곳은 바로 그들이 그토록 불신하던 연방 정부였다.


민주당 오바마 정부 당시 허리케인 샌디가 다른 주를 덮쳤을 때는 연방 지원을 “선심성 예산”이라 맹비난했던 텍사스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정작 자신의 지역이 물에 잠기자 그 누구보다 강력한 연방 지원을 요구했다. 이는 평소에는 원칙을 외치다 위기가 닥치면 말을 바꾸는, 이른바 ‘맑은 날의 연방주의(fair-weather federalism)’의 전형이다.


더 아픈 진실은, 그들이 지지했던 ‘작은 정부’ 정책이 연방의 재난 예측 및 예방 시스템을 약화시켜 결국 자신들의 이웃과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점이다. “텍사스 유권자들이 자신들의 투표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라고 일성한 한 의사의 소셜 미디어 게시물은 엄청난 논란 끝에 해고로 이어진 사건은, 이 지역의 비극이 얼마나 깊은 정치적 상처와 자기모순 위에 서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17083001004226800332832.jpg 텍사스 수해 현장 방문길, 트럼프 대통령 부부



트럼프 대통령은 텍사스 홍수에 대해 “몇 초 만에 일어난 일이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며 “매우 유능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고 해도 그들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상청 인력 감축에 변경은 없다"라며 정부의 계획을 강행할 것을 시사했다. 참사 수습도 더디다. <가디언>은 "현재 미국의 연방재난관리청이 너무 축소된 상태라 재난에 유의미한 대응을 하는 것이 가능한지 가늠하지 어려운 상태"라며 "이 와중에 연방재난관리청장은 매우 이례적으로 이번 사태를 언급조차 않고 있는 점을 볼 때 그들은 더 이상 신뢰하기 어려운 기관이 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보도했다.










책임은 어떻게 증발하는가



재난의 순간, 책임을 회피하고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듯한 태도는 바다 건너 한국의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겹쳐 보인다. 텍사스에서 수백 명의 실종자를 찾기 위한 사투가 벌어지던 그 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뉴저지의 골프 클럽에 머물고 있었다.


이는 2023년 오송 지하차도 참사 당시, “내가 지금 당장 한국으로 간다 해도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며 NATO 일정을 연장해 우크라이나 순방을 강행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의혹은 삼부토건의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 참여로 인한 주가 띄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국가의 최고 리더들은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이러한 리더십의 공백은 행정부 전체에 퍼진 책임 회피 문화와 맞닿아 있다. 트럼프는 이번 텍사스 홍수 참사의 원인을 “신의 뜻”으로 돌리며 시스템의 문제와 자신의 책임을 외면했다. 윤석열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 역시 참사 앞에서 믿기 힘든 언행을 보였다.




이태원 참사


159명의 생명이 스러진 이태원 참사 직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이는 명백한 정부의 사전 대비 실패 책임을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


14명이 희생된 오송 지하차도 참사 당시, 김영환 충북도지사“내가 거기 갔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재난 대응의 최고 책임자가 자신의 존재 가치와 시스템의 중요성을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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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9일, 반지하 침수로 목숨을 잃은 발달장애 가족 참변 현장을 들여다보는 윤석열 (당시) 대통령. "어제 내가 퇴근하는 길에 보니 저지대에 물이 많이 찼더라" “근데 여기 어떻게, 여기 계신 분들 미리 대피가 안 됐나 모르겠네”라고 반문했다. 그리고 대통령실은 이 사진을 국정 홍보하는 데 사용했다가 논란이 일자 삭제했다.



텍사스에서 “기상학자를 더 뽑을 필요 없다”고 말한 트럼프나, 서울과 충북에서 “경찰이 더 있었어도”, “내가 갔어도” 소용없었을 것이라 말한 한국의 공직자들은 하나의 공통된 논리를 공유한다. 바로 재난 대비의 가치를 폄하하고, 시스템의 중요성을 부정하며,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게으르고 무책임한 자기 합리화이다. 이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의 근본을 부정하고, 관료 조직의 안위를 인간의 존엄성보다 우위에 두는 비정한 통치 철학의 발현이다.










어쩌면 모든 비극의 시작은, 언젠가부터 누군가가 장부 위에 사람의 목숨값을 적어 넣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생명을 구하는 데 드는 비용이 그 목숨의 가치보다 높다고 판단되면, 그 죽음은 ‘비극’이라는 이름 대신 ‘효율’이라는 서류철에 분류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죽음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한 시대의 종언(終焉)을 목격하는 중이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든, 사람은 무조건 살리고 봐야 한다’라는 절대 명제가 진리이자 본질이었던 시대의 단단했던 믿음이 저물어가는 황혼을 말이다.


한 국가의 정책 문서는 단순히 종이 위에 새겨진 활자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죽음을 미리 알린 예언서였다. 하나의 이념은 사상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한밤중의 강물이 되어 아이의 잠든 방 창문을 부수고는 모든 것을 휩쓸어 갔다.


진정한 ‘복구’는 무너진 제방을 다시 쌓는 토목공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념의 홍수 속에서 함께 떠내려간 우리 사회의 가장 깊은 믿음, 즉 ‘국가가 최소한 나와 이웃의 생명을 지켜줄 것’이라는 그 믿음을 다시 건져 올리는 지난한 작업이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이뤄지는 그 어떤 계산도, 그 어떤 거창한 명분과 이념도, 강가에 홀로 남겨진 젖은 신발 한 짝, 주인을 잃은 곰 인형 하나의 무게보다 결코 무거울 수 없다. 인간성의 마지노선을 이미 건너버린 시대, 나는 공허하게 또다시 인간성의 회복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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