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은 명작을 만들 수 있는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야기를 소비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더 깊은 공허함을 느낀다. 손가락 하나로 수천 개의 콘텐츠를 넘나들 수 있는 시대, 우리의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고 선택지는 언제나 과잉이다. 최근 넷플릭스가 공개한 영화 <84제곱미터>는 바로 이 시대적 풍경의 한복판에 놓인, 의미심장한 징후다. 영화는 '아파트'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로 폭발적인 화제를 낳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관객의 마음을 끝까지 붙드는 데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이 기묘한 성공과 실패의 간극은, 우리에게 플랫폼 시대의 창작과 자본, 그리고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콘텐츠 자본주의: '시간'을 점령하려는 새로운 헤게모니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 플랫폼의 비즈니스 모델은 극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극장이 관객의 '티켓값'을 목표로 한다면, 이들의 목표는 관객의 '시간'이다. 더 정확히는, 구독자가 이탈하지 않고 플랫폼 안에 최대한 오래 머무르게 만드는 '총 재생 시간'과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다. 이러한 자본의 논리 아래서, 콘텐츠는 예술적 성취 이전에 플랫폼의 생존을 위한 '미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 모델에서 두 시간짜리 걸작 한 편보다, 어쩌면 열 시간짜리 평작 시리즈가 더 높은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위대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붙잡아 둘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84제곱미터>처럼 사회적으로 뜨거운 소재, 매력적인 배우, 그리고 장르적 쾌감을 앞세운 '화제성 있는' 콘텐츠가 끊임없이 양산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알고리즘은 '명작'을 추천하기보다, 당신이 지금 바로 클릭할 만한 '볼거리'를 제시하는 데 더 뛰어나다.
기회의 역설: '담금질' 없는 창작의 시대
물론 넷플릭스가 한국의 신예 창작자들에게 '기회의 땅'이 되어준 공로는 부정할 수 없다. 과거 충무로의 좁고 높은 문턱을 넘지 못했던 수많은 재능 있는 감독들이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는 분명 한국 영화 생태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긍정적 측면이다.
하지만 이 '기회'는 양날의 검이다. 전통적인 영화 제작 시스템에는 비효율과 관료주의라는 단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이들의 비판과 협업을 통해 시나리오를 다듬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담금질'의 과정이 존재했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제작 과정은 이 담금질의 시간이 생략되거나 축소된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든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충분한 숙성 과정 없이 '프로젝트'로 급하게 추진될 때, 작품은 깊이를 잃고 표면적인 자극의 나열에 그칠 위험이 커진다.
<84제곱미터>는 '프로젝트'로서는 성공했으나 '작품'으로서는 미완에 그친 대표적인 사례다. 영화는 한국 사회의 불안이라는 예리한 칼을 손에 쥐었지만, 그 칼을 어떻게 휘둘러야 할지 몰라 서사의 후반부에서 길을 잃고 만다. 이는 창작의 기회는 주어졌으되, 그 기회를 예술적 성취로 승화시킬 충분한 시간과 시스템적 성찰은 부족했음을 방증한다.
'적당함'의 미학: 알고리즘은 우리의 취향을 어떻게 길들이는가
결국 넷플릭스의 물량공세가 낳는 가장 우려스러운 지점은 '적당히 볼 만한(good enough)' 콘텐츠의 범람이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시청 데이터를 기반으로 우리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조합하여 콘텐츠를 추천하고, 나아가 콘텐츠 제작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취향은 안전한 방향으로 길들여진다. 낯설고 불편하지만 새로운 미학적 경험을 주는 작품보다는, 익숙하고 예측 가능한 장르적 쾌감을 주는 작품이 선호된다.
이러한 '적당함'의 미학이 만연할 때, 관객은 점차 비평적 안목을 잃고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우리는 더 이상 위대한 작품을 '기다리지' 않고, 지금 당장 소비할 수 있는 '새로운 것'에만 열광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플랫폼은 수많은 '볼거리'를 남기겠지만, 시간의 마모를 견디고 살아남는 '작품'을 남길 수 있을지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질문으로 남았다. 넷플릭스라는 거대한 용광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새로운 쇠를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단지 뜨겁기만 한 쇳물일지, 아니면 단단하게 벼려진 명검일지는, 우리 모두가 냉정한 시선으로 지켜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