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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병원 대기실의 시간

4부. 관계와 삶의 공간들, 연결과 성찰

by 조하나


병원 대기실만큼 우리 삶의 허위와 위장을 정직하게 무력화시키는 공간이 또 있을까요. 인공적인 조명 아래, 소독약 냄새와 희미한 통증, 누군가의 애써 참는 기침 소리가 공기 중에 무겁게 부유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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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고 불편한 의자에 몸을 맡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응시하지만, 그 눈빛들 속에는 ‘기다리는 자’의 동질적인 불안이 섬세한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사회적 지위나 화려한 언변, 잘 다려 입은 옷 같은 것들이 한낱 얇은 종이처럼 힘을 잃습니다. 우리는 모두 ‘환자’ 혹은 ‘환자의 보호자’라는 이름 아래,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타인의 도움과 시간의 처분을 기다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 실존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 ‘취약성’입니다. 우리는 평소 이 사실을 잊거나, 강하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갑옷을 입고 애써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질병이라는 예고 없는 방문객은 그 모든 갑옷을 강제로 해체하고 우리를 연약한 맨몸으로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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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이 피할 수 없는 취약성이야말로 우리를 서로에게 기대게 하고, 윤리적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는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내가 넘어질 수 있기에, 넘어진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법이니까요. 병원 대기실은 바로 그 진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우리가 원치 않았으나 가장 진실한 ‘마지못해 형성된 공동체’입니다.


이곳의 시간은 일상과는 다른 물리법칙을 따르는 듯합니다. 시간은 앞으로 흐르기보다 끈적한 점성을 가지고 공간을 채우며, 1분 1초가 더디고 무겁게 살갗에 내려앉습니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그 시간의 진공 속으로 맹렬히 파고듭니다. 이 시간의 본질은 통제 불가능한 상황 앞에서 결과를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 ‘기다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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