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심과 역사의 충돌에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영국 밴드 오아시스에겐 유독 사적인 감정이 많다. 90년대와 2000년대 브리티시 록, 하면 오아시스와 라디오 헤드였고, 해외 한 번 나가 본 적, 외국인과 직접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으면서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오아시스처럼 짝다리를 짚고 건방지게 턱을 높이 치켜들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순간, 나는 이 세상에서 말 그대로 ‘짱’이었고,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몸을 말아 감싸 안으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비참한 ‘외톨이’였다.
앨범 판매량이나 씬 자체가 크지 않은 한국은 언제나 여름 페스티벌 시즌이면 대형 글로벌 아티스트가 일본을 가기 전 거치는 곳이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서 공연을 해보면 뮤지션들은 한국 관객의 떠나갈 듯한 떼창에 놀라며 묻는다. “내 앨범이 안 팔려서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다 알고 떼창을 하는 거야?”
음악 씬을 서성거리며 잡지 에디터 일을 오랫동안 해온 나에게 노엘 갤러거와의 인터뷰는 버킷 리스트 TOP3에 드는, 그야말로 꿈이었다. 나는 뜬금없이 “언젠가 노엘 갤러거 인터뷰를 하는 날이 오면, 그게 내 마지막 인터뷰가 될 거야”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왜인지는 잘 몰랐다. 그냥 내가 만나고 싶었던 아티스트는 다 만났고, 노엘 갤러거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살인적인 투어 스케줄로 대부분의 글로벌 아티스트들은 인터뷰를 안 하는데, 이미 한차례 있었던 자신의 솔로 앨범 발매 단독 공연에서 한국인의 떼창을 경험한 노엘 갤러거가 나와의 단독 인터뷰를 허락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이크 드뢉!!!” 하고 소리를 질렀다.
‘2015 안산 M 밸리 록 페스티벌’ 첫째 날 헤드라이너 무대를 앞두고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그와 나눈 인터뷰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의 대기실 컨테이너엔 맨체스터 시티 현수막이 크게 걸려있었고, 나는 노엘 갤러거가 만들어 준 (맛없고 밍밍한) 요크셔 티를 마셨다.
그는 무대의 모습과 달리 단어 하나에도 신중했고, 배려 깊고, 여유가 넘쳐흘렀다. 우리는 10분으로 한정됐던 인터뷰를 30분으로 늘려가며 대화를 나눴다. 오아시스 재결합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는 “맨체스터 시티가 우승하면”이라는 농담으로 넘겼고, 나는 이를 기사에 싣지 않았다. 그들이 재결합을 하든 안 하든 내 청춘을 상징하는 오아시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평소 하고 다녔던 말처럼 노엘 갤러거와의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잡지사를 나와 한국을 떠났다. 그 후 맨체스터 시티가 프리미어 리그에서 정말로 우승했고, 오아시스는 재결합을 알렸다. 그들의 월드투어 스케줄에 대한민국이 빠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오아시스는 그들의 SNS에 욱일기가 연상되는 이미지를 올렸다.
한국 팬들은 당연히 발끈했다. 어떤 이들은 분노에 차올라 공연 보이콧을 선언했고, 어떤 이들은 어르고 달래고 타이르고 설명하며 이미지를 내리라고 부탁했다. 오아시스 측은 사과하지 않았고, 여전히 그들의 공식 홈페이지엔 욱일기 이미지가 걸려 있다. 앞으로도 그들은 사과하지 않을 것이고,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게 오히려 ‘우리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라는 의견을 꼿꼿하게 관철할 수 있는 록커다운 애티튜드라 생각할 테니까. 폭력과 제도, 시스템에 저항하는 록 스피릿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나에겐 수면 아래 잠겨 있던 상념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떠올랐다. 해외에서 지낼 때 만난 영국인 친구의 얼굴이었다. 어느 날 그는, 욱일기 문양의 반다나를 머리에 두르고 나타났다. 나는 울그락 불그락 해진 얼굴을 미소로 애써 감추며 어떻게 하면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그것을 벗겨야 할까 고민했다. 그 욱일기 이미지가 한국, 중국, 동남아 국가의 전쟁 피해자들에게 어떤 상흔을 헤집는 칼날이 되는지 설명했을 때, 그는 “몰랐다”며 사과했지만, 그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어떤 심각성도, 아픔에 대한 깊은 공감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에게 그것은 이국의 낯선 역사, 자신과는 무관한 다른 인종의 먼 과거일 뿐이었다.
그때 느꼈던 기묘한 거리감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수많은 서구권 국가 사람들은 세계 제2차 대전, 일본이 전범 국가로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놀랄 만큼 잘 모르거나 무심하다. 제국주의의 그림자를 공유했던 영국이기에 오히려 일본의 편에 서는 것일까. 혹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비극 앞에서 다른 모든 악행은 상대적으로 사소하게 치부되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대륙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고통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일까.
종전 이후 지금까지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진 일본의 집요하고 교묘한 이미지 세탁은 어쩌면 이 모든 심리적 기제를 파고들어 성공적으로 작동해 왔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참회는커녕 역사를 부정하는 저들에게, 8월 15일은 우리만의 기억이 아니라 상처 입은 자들의 연대를 통해 외쳐야 할 세계의 진실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미쳤을 때였다.
이에 대한 짧은 소회를 밝힌 내 글에 유독 한 사람이 시비를 걸었다. 그는 마치 준비된 각본을 읽듯 특정 커뮤니티의 논리와 주장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읊었다. “욱일기가 뭐 어때서. 보상은 끝났다. 결국 돈이 목적 아니냐. 사과를 구걸하지 마라.” 의사 수련 중인 20대 남성의 정체성을 명시하는 프로필과 글들이 수두룩했다. 생명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젊은 지성이, 타인의 고통을 이토록 손쉽게 난도질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분노가 치밀기보다, 기이한 슬픔이 먼저 찾아왔다.
나는 언제나 볼테르의 말을 떠올린다.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는 약속. 그래서 나는 “당신과 나의 생각은 다르지만 존중한다. 그러니 각자 갈 길을 가자”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상대의 예의와 배려를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도구로 삼아, 수많은 전쟁 범죄 피해 중에서도 유독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를 끄집어내 모욕하기 시작했다. 그의 집요함은 토론이 아닌, 오직 상대를 파괴하려는 목적만을 향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비웃음과 함께 쐐기를 박았다. “피해자 코스프레 하지 마라. 너희 따위가 연대해서 뭘 할 수 있냐.”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 인식의 차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자의 논리, 가해자의 언어였다. 약한 자들의 연대를 비웃고,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코스프레’로 치부하며, 세상의 모든 상처를 돈과 힘의 문제로 환원하는 비정한 세계관의 발현이었다. 분노를 넘어 안타깝고, 처연하고,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다른 종류의 말을 건넸다. 논쟁이 아닌,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기도였다.
“네가 사는 세상엔 그런 건 의미가 없나 보지. 하지만 내가 사는 세상엔 큰 의미가 있거든. 인생, 생각보다 길다. 네가 앞으로 살다가 고꾸라지는 순간이 분명 올 거야. 지금껏 운이 좋아 없었더라도, 죽기 전에 한 번은 와. 장담해. 그리고 너에게 누군가의 관심과 연대가 절실할 때, 네 곁엔 아무도 없을 거야. 바로 그 순간, 너는 이 대화를 떠올리게 될 거야. 부디 좋은 의사가 되길.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너의 환자가 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게.”
그러자 그는 자신이 쓴 모든 글을 지우고 사라졌다. 내 마지막 말이 그의 직업적 윤리를 건드렸기 때문인지, 스스로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면 끝까지 분노하지 않는 나의 태도에 질려버렸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청년이 오아시스 재결합 내한 공연에서 록 스피릿을 외칠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그가 살면서 언젠가 사랑을 주고받으며, 이유 없는 친절과 조건 없는 연대의 힘을 경험하기를.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는 순간, 누군가 내민 손의 온기를 느끼게 되기를. 그리하여 자신이 뱉었던 말들이 얼마나 공허하고 잔인했는지,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자아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기를. 그가 머물던 메아리 없는 방에서 걸어 나와, 다른 세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기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앞으로 수많은 아픈 이들을 마주해야 할 한 명의 의사로서,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