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말에 담긴 우주적 진실.
“과거가 현재를 살린다”는 한강 작가의 문장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때로는 희미한 배경음악처럼, 때로는 선명한 핏줄처럼 차분한 진실의 얼굴을 하고는 우리 앞에 나타난다.
얼마 전 극적으로 타결된 이재명 정부와 트럼프 정부의 한미 관세 협상 테이블 위, 빼곡한 수치와 논리가 오가는 냉정한 공간에 2008년 MB정권 당시 오래도록 지속됐던 100만 촛불시위 사진과 동영상이 놓였다. 그 사진 안엔 나도 있었으리라.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나 추억을 의미하는 자료가 아니었다. 아스팔트의 열기, 함성의 진동, 민심(民心)이라는 거대한 바다의 포효를 고스란히 품은 시대의 화석이었다. 협상가들은 데이터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집단적 기억과 상처, 그리고 끝내 꺾이지 않았던 의지의 역사를 증거로 내밀었다. 결국 농수산물 추가 개방을 막아낸 우리의 ‘선방’은 가장 치열했던 과거가 가장 절박한 현재의 손을 또다시 잡아준 순간이었다.
그 기억의 힘은 비단 광장에서만 타오른 것이 아니다. ‘MASGA(Make America Shipbuilding Great Again)’라는 위트 넘치는 이름 뒤에는, 세상의 모든 위대함이 그렇듯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거친 숨결과 굳은살 박인 손이 있었다. ‘세계 2위 조선업’ 국가 대한민국이라는 영광의 이면에는, 닭장처럼 비좁은 철제 구조물에 아주 오래도록 제 몸을 구겨 넣고 싸워야 했던 조선업 노동자들의 절규가 있었다. 월급을 쥐고 흔드는 실질적 사용자인 원청 대우조선은 법의 그림자 뒤에 숨어 교섭의 의무를 피했고, 생존을 위한 그들의 투쟁은 ‘불법 파업’이라는 족쇄를 찼다. 파업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측의 470억 원이라는 손해배상 청구는, 한 인간의 존엄을 숫자로 환원하려는 시대의 폭력이었다. 그리고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한화오션(구 대우조선)은 5일 전, 470억 손해배상 청구를 취소했다.
그러나 역사는 이따금 가장 부조리한 방식으로 정의를 향한 길을 연다. 권력의 정점에서 기득권의 성벽을 쌓던 윤석열이 12.3 내란의 피의자가 되어 ‘범죄자의 인권’을 부르짖는 모습은, 헤겔의 말처럼 ‘역사의 교활함’을 보여주는 한 편의 블랙 코미디이다. 김건희의 비선으로 지목된 건진법사의 법당에서 일본 신 아마테라스를 모셨다는 기이한 이야기가 영화 <파묘>의 서사와 겹쳐지고, ‘하나님’을 부르짖는 ‘머리 검은 외국인’ 모스 탄 같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들어와 적그리스도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나라의 땅 밑에 박힌 흉한 쇠말뚝을 파내듯 우리 사회 가장 깊은 곳에 뿌리내린 야만과 기만을 걷어내는 의식을 지금도 치르고 있다.
이 모든 격랑 속에서, 한미 관세 협상에서 농축산물 추가 개방을 막았고, 마침내 ‘노란봉투법’이 희망의 깃발을 올리며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려 한다. 2024년 12월 3일, 국회로 달려간 사람들, 응원봉을 들고 광화문으로, 남태령으로, 한남동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몇 세기 만에 나타난 ‘귀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귀인은 신화 속 영웅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바로 ‘우리’라는 이름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집’, ‘우리나라’, ‘우리 학교’. 한국인은 ‘우리’라는 단어에 유독 깊은 애착과 연대감을 담는다. 이 단어는 단순한 소유격 대명사가 아니다.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의 운명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관계의 선언이다.
내가 이 자리에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옆 사람의 삶이 바뀌고, 그 파동이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까지 번져나가 세상을 바꾼다. 이것이 바로 ‘우리’라는 말에 담긴 우주적 진실이다. 알든 모르든 우리는 서로에게 얽혀 있고, 나의 몸부림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야만의 시대를 견뎌왔다. 무의미하게만 보였던 그 수많은 저항과 눈물, 한 뼘 공간에서의 처절한 외침, 그리고 12.3 계엄의 어둠을 갈랐던 응원봉의 불빛들. 그 모든 과거의 파편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이어져, 마침내 현재를 구원하는 별자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응원봉의 빛은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까?
그것은 바로 ‘기억하는 미래’이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잊지 않는 미래, 한 장의 사진이 협상의 결과를 바꾸고 한 뼘의 공간에서 지켜낸 존엄이 법을 바꾸었음을 기억하는 미래, ‘나’의 고통이 곧 ‘우리’의 고통이었고 ‘우리’의 연대가 곧 ‘나’를 구원했음을 잊지 않는 미래이다. 그 빛은 다시 찾아올지 모를 야만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는 등대가 될 것이고, 우리가 함께 서 있는 한 결코 혼자가 아님을 일깨우는 따뜻한 증표가 될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살렸듯, 이제 그 기억을 품은 우리가 미래를 살릴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