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한 언론의 업보
켄드릭 라마는 세계인이 지켜보는 슈퍼볼 무대에서 당대의 권력을 향해 외쳤다. “혁명이 곧 TV로 방송될 것이다. 당신들은 ‘적기(the right time)’에 ‘잘못된 사람(the wrong guy)’을 선택했다.” 그 자리엔 이제 막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대통령이 된 트럼프가 앉아 있었다.
켄드릭의 목소리에는 억압에 저항하는 예술가의 기개와, 민주주의의 심장을 뛰게 하는 표현의 자유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것은 강자를 향한 정당한 비판이었고, 그렇기에 ‘멋’이 있었다.
시선을 우리 땅으로 돌려보자. 한때 정치 풍자가 넘쳐나던 코미디 프로그램은 약자에 대한 혐오와 조롱으로 연명하고, 권력을 향한 날 선 질문은 사라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 앞에서 쓴소리를 내뱉는 예술가는커녕,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방송국(TBS)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시대를 살았다.
그러다 12.3 내란 사태를 맞았다. 그렇게 돈, 돈, 돈, 하는 기득권의 나팔수 언론들은 대통령 하나가 나랏돈 수백조를 날렸는데 날카로운 문장 한 줄을 못 쓴다. 기어코 시민들의 힘으로 정권을 바꾸고, 이제, 드디어, 방송 3법 처리가 코앞이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박근혜 정권부터 논의된 언론 개혁법인데, 기득권 언론의 사설은 "숙의가 부족하다"라는 허술하고 허망한 논리만 내세우고 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과도하게 '자유' 타령을 하던 윤석열 정권에서 이제 막 벗어났다. 우리는 과연 '자유의 나라'에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마주한 모든 문제의 근원이며, 부패한 언론이 쌓아 올린 업보의 시작이다.
현재 한국 언론의 비극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군사 독재 시절, 권력의 총구 앞에서 스스로 언론이기를 포기하고 ‘독재의 나팔수’가 되기를 자처했던 비겁한 역사의 유산이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와 전두환의 광주 학살을 미화하고 정당화했던 <조선일보> 같은 신문들은 지금도 버젓이 우리 사회의 주류 언론 행세를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가 나치 부역자들을 숙청할 때 가장 먼저 단죄했던 대상이 바로 언론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진실을 배반하고 동료 시민을 기만한 죄를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현재의 괴물이 되어, 권력, 자본, 검찰이라는 ‘부정한 삼위일체’와 결탁하며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좀먹고 있다. 삼성의 불법 승계에 침묵하고, 검찰이 흘려주는 정보로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며,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에는 눈감는 그들의 모습은 독일 언론이 말한 “대통령 무릎에서 노는 애완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부패한 언론이 휘두르는 가장 교활한 무기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허울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세력의 억지와 상식을 지키려는 시민의 목소리를 동등하게 배치하며, 언론은 스스로 판단을 유보한다. 이는 공정성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비겁한 직무유기다.
나치 시절 독일 언론이 히틀러의 선동과 유대인 학살을 ‘하나의 견해’처럼 다루며 인류사적 비극을 방조했음을 우리는 안다. 르완다 학살 당시, 부족 간의 증오를 부추기는 라디오 방송이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음을 기억한다.
명백한 허위와 혐오, 반민주적 폭력을 ‘양측의 주장’으로 포장하는 순간, 언론은 진실의 파수꾼이 아니라 폭력의 공범이 된다. 자신들을 향한 비판에는 “언론 탄압”이라 외치면서도, 동료 언론인(김현정)의 명백한 정언유착 의혹에는 침묵하는 ‘패거리 문화’는 그들의 세계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언론이 질문을 멈춘 사회는 서서히 죽어간다.
‘어째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에서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무한경쟁에 내몰려야 하는가?’, ‘어째서 30년 후 소멸이 예고된 나라에서 우리는 아이를 낳으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째서 사법부는 AI보다 나을 것이 없는 판결로 사회 정의의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뜨리는가?’
이런 본질적인 질문 대신, 언론은 만만한 연예인을 제물 삼아 대중의 분노를 배설할 ‘마녀사냥'’의 판을 벌인다. 배우 이선균 같은 한 인간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끔찍한 과정 전체가 언론의 가십과 대중의 관음증, 그리고 수사기관의 비열한 여론플레이가 합작한 거대한 살인이었음에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다. 자신들이 만든 댓글에 상처받는 연예인을 조명하며 댓글의 폐해를 지적하는 기사를 쓰는 위선은 이제 역겨울 정도다.
윤석열 정부의 ‘입틀막’엔 침묵하며, 야당 대표였던 이재명을 향해서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달려들었던 그들에게 국민이 신뢰를 보낼 리 만무하다. “정부, 기업, 언론을 믿지 않는다”는 한국인의 비율이 28개국 중 27위라는 처참한 성적표는 바로 그들이 자초한 업보의 결과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싹튼다. 기성 언론이 스스로 권위를 내던진 폐허 위에서, 시민들은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유튜브와 같은 대안 언론의 등장은 옥석을 가려야 하는 과제를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기존의 독과점 구조에 균열을 내고 있다. 시민들은 이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정보를 소비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정보를 찾고, 교차 검증하며, 스스로 의제를 만들어 간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처럼 투명한 공영방송과 높은 미디어 리터러시를 갖춘 사회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언론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끊임없는 사회적 합의와 노력의 산물이다.
언론이 스스로 개혁할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에 가깝다. 그들의 목에 칼이 들어오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는 언제나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에서 시작되었다.
부패한 언론이 묻어버린 질문들, 이제 그 질문의 횃불을 우리가 들어야 한다. 진실을 향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이 길고 긴 업보의 사슬을 언젠가는 끊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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