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29 이태원 참사에 출동했던 소방관이 실종 열흘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나이, 이제 겨우 서른이었다.
그는 떠나기 직전 가족과 지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무엇이 그토록 미안했을까. 누군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을까, 누군가를 살리고 자신은 스스로 지키지 못했다는 좌절감이었을까, 아니면 이 지옥 같은 기억을 안고 더는 살아갈 수 없다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었을까.
그의 죽음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명백한 참사의 연장선이며, 잊으라고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다 스러져간 또 다른 희생자다. 애타게 아들을 찾는다는 전단지를 붙이며 오매불망 돌아오기만 해 달라 손이 닳도록 기도했을 그의 어미는 또 다른 유가족이 되었다.
그의 소식은 나의 트라우마에 트리거를 당겼다. 참사 이후 나는, 지금까지도 이태원에 갈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내 젊음의 터전이었고, 수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소외된 사람들의 은신처가 되어주던 그곳은 이제 금지된 땅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핼러윈 파티를 챙기지 않는다.
나도 이런데, 그날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삶과 죽음의 문이 열려버린 아비규환에서 버텨야 했던 그는 오죽했을까. 부디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제 그만 죄책감 내려놓고 편히 쉬라고, 차마 가닿지 못할, 늦은 말을 건넬 뿐이다.
영정 사진도, 위패도 올리지 말아라. 근조 리본도 뒤집어 달아라. ‘참사’라는 단어 대신 ‘사고’라고 칭하라. 추모할 권리마저 앗아간 정부, 희생자에게서 얼굴과 이름을 앗아간 악마들. 여태 책임지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사과는 정권이 바뀌고 나서야 새로운 대통령에게 들었다. 대한민국, 우리의 이 업보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모두 목격자다. 2014년, 속절없이 잠겨가는 세월호를 보며 발만 동동 굴러야 했던 우리는 함께 트라우마를 앓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 직후, 몇 달을 팽목항에서 먹고 자며 취재하던 방송사 기자 친구는 결국 그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하고 한국을 떠났다. 나 또한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시위와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의 지시를 얌전히, 착하게 따른 아이들을 기리는 침묵시위에 참가하다 결국 한국을 떠났다. 시리도록 푸른 바닷속으로 들어가 아쿠아 칠판에 ‘박근혜 OUT’이라 썼고, 거대한 고래상어가 찾아올 때마다 아이들의 영혼일 거라 믿었다.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또 다른 형태의 집단 트라우마를 쌓았다. 오랜 사회적 거리 두기를 끝낸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파티를 열고, 죽은 자의 영혼을 기리고 산 자의 지금 이 순간을 기념할 때, 나는 타국에 있었다. 한창 무르익은 핼러윈 파티에서 동료 외국인 강사들이 내 어깨를 잡아끌며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인스타그램 라이브였다. 익숙한 동네, 익숙한 골목. 이태원이었다. 서울 한복판 시커먼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는 사람들, 심폐소생술을 하며 어떻게든 떠나는 영혼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뒤엉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바다 건너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아비규환 속에서, 외국인 친구들은 그 장면을 플래시몹이라 여겼다. “한국인들 지금, 핼러윈 파티에서 ‘오징어 게임’ 하는 거야?”
그 질문이 만든 아득한 거리감 앞에서, 나는 홀로 비명을 삼켜야 했다. 스크린 속 고통은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현실이 되어 내게 박혔다. 이후 알 수 없는 무기력감과 우울감이 다시 몰려왔다. 오랜 타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윤석열은 상처에 상처가 쌓인 가엾은 국민을 향해 계엄을 선포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를 또다시 유튜브 라이브로 목격해야 했다.
참사 그 자체도 고통이지만, 진짜 지옥은 그 이후에 펼쳐졌다. 진상을 밝혀달라는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 투쟁 앞에서 ‘일베’가 폭식 투쟁을 하며 악마의 얼굴을 드러냈다. 그 끔찍한 혐오와 조롱은 우리 사회에 전염병처럼 번져, 이후 모든 참사의 희생자들에게 온갖 음모론의 칼날이 되어 날아들었다. 상처 입은 자가 다른 상처를 보듬는 동안, 어떤 자들은 그 상처를 갈아 더 약한 자를 찔렀다. 그때부터였다. 사람들은 ‘내가 죽지 않으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다른 이를 짓밟고 올라서 강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신념에 빠져 한 움큼의 수치심마저 버렸다.
이런 땅에서 온전하게 살아남는 게 기적이다. 전 국민이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 공황장애, PTSD, 만성 무기력감에 시달리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인정하든 않든,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집단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 모두가 아픈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째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참사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무력감의 끝에, OECD 자살률 1위라는 이 나라의 서글픈 자화상이 있다.
그래도, 결국, 사람만이 답이다. 실망도 절망도 사람이지만, 구원도 희망도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생존자인 동시에 목격자이자, 서로를 위한 증인이다. 증인이란 그저 보는 사람이 아니다. 망각을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 기억하는 사람, ‘사고’가 아니라 ‘참사’였다고 말하는 사람, 지워진 이름과 얼굴을 끝까지 불러주는 사람, 당신의 슬픔은 정당하며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온몸으로 말해주는 사람이다. 서로의 기억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희미해지는 진실의 윤곽을 붙잡아주는 것. 서로의 고통을 왜곡하는 세상의 언어로부터 서로를 지켜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치유의 방식이다.
다른 이의 상처를 들여다보려면, 자신의 상처를 먼저 꺼내 보이는 용기를 내야 한다. 화려한 옷을 갑옷처럼 껴입고 두꺼운 화장을 가면처럼 뒤집어쓴 채 잘난 척해봐야, 우린 모두 이 비극의 생존자일 뿐이다.
그렇게 서로의 증인이 되어주기로 결심한 영혼들은, 갈 곳 잃은 슬픔의 망망대해에서 마침내 서로를 알아보고 슬픔의 섬에 닿는다. 그래. 그렇게 만나는구나. 마음껏 슬퍼하지도, 온전히 애도하지도 못한 연약한 마음들이, 결국 이렇게 세상 끝의 바다에서 서로의 증인이 되어 만나는구나.
그 섬에서는 서른 살의 소방관도, 기자를 그만둔 내 친구도, 고래상어가 되어 떠돌던 아이들도, 그리고 스크린 앞에서 홀로 울어야 했던 나도, 우리도, 그저 서로의 맨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가면과 갑옷을 벗어던지고 서로의 상처를 통해 비로소 연결된다. 그 슬픔의 섬에서는 누구도 외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