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진보적인 정파의 가장 진보적인 순간만을 가장 짧게만 지지하기.
우리는 ‘진보의 위선’이라는 낡고도 익숙한 무대 위에 다시 섰다. 막이 오르면, 언제나처럼 거대한 대의와 성스러운 명분을 외치는 목소리가 장내를 채운다. ‘내란 종식’, ‘검찰 독재 타파’, ‘민주주의 수호’, 그 숭고한 구호들은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처럼 뜨겁고 순수해 보인다. 그러나 그 화려한 빛 뒤편, 가장 어둡고 축축한 구석에서 또다시 ‘여성’이 이미지 정치의 도구로 쓰이고 소모되며, 끝내 침묵 속에 버려지는 광경을 목격한다.
내란 사태 전후로 나는 한때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을 챙겨 보았다. 민주 진영에서 김어준이라는 인물이 수행한 역할이 분명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진보’ 언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200만이 넘는 구독자를 거느린 채널의 민주당 스피커라고 해서 그 인물이 ‘진보’를 뜻하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김어준이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여성’을 다루고 이용하는 방식을 목도하며 느낀 깊은 불편함은 내가 그 채널을 외면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그는 ‘김어준 생각’이라는 짧은 단독 논평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그리고 뉴스 브리핑을 위해 젊은 여성을 그의 앞에 앉힌다. 어차피 김어준이 혼자 90% 이상 발언하기에 그 앞에 말을 받아주는 앵커가 있어야 하는 명분이 궁색하다. 게다가 김어준은 프로그램 런칭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여성’ 앵커만을 고집한다.
구색을 맞춰 보이려는 그 자리에서, 여성 앵커는 정치에 대해 잘 모르고, 그의 아우라에 주눅이 든, 어리고 미숙한 존재로 그려진다. 김어준은 여성 앵커에게 짓궂은 표정과 말투로 대본에 없는 질문을 기습적으로 던지고, 당황하며 쩔쩔매는 여성의 모습을 수십만 시청자 앞에서 조롱하며 자신의 지적 우월감을 과시한다. 현재 그 자리에 앉은 권민정 앵커는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시험대 위에서 주눅 든 아이처럼 보인다. 어쩌다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면, 김어준은 그녀에게 “대구 출신이라 그렇다”, “네가 잘 몰라서 그렇다”, “네가 정치 저관여층이라 아는 게 없다”는 식으로 무안을 준다.
권민정 앵커 이전에 잠시 그 자리를 지킨 김지은 앵커가 있었다. 생방송 중 전 국민 앞에서 김어준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하와 조롱에 눈물을 쏟기 직전까지 내몰리곤 했다. 수십만의 댓글은 그런 김어준을 응원하며 김지은을 비하하고 조롱한다. 내가 그녀였다면, 혹은 그녀의 가족이었다면,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낄 정도의 수위였다. 매일 아침, 온라인 집단 괴롭힘이 생방송으로 계속됐다.
사람들은 '우리 편'을 대표한다는 김어준의 성 착취적이고 마초적이며 컬트적인 가학성을 통해 대리 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리고 '우리 편'의 비위와 문제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에게 늘 '우리 편', '우리 진영'을 외치며 '갈라치기'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다. 자신들은 다른 이들을 비판하고 조롱할 권리가 있지만 자신들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거대한 악과 싸운다는 명분에 취해 김어준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손가락질 한다. 여기에서 주어만 바꾸면 그들과 가장 먼 대척점에 있는 극우 신봉자들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이 바로 김어준이 자신을 '언론'이라 포지셔닝하며 지금까지 만들어 온 팬덤이자 컬처다.
결국 얼마 안 가 김지은 앵커는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개인 SNS에 할 말은 많지만 않겠다고 밝혔다. 누군가에겐 말하는 것조차 권력이 필요하다. 그 자리에 안귀령 앵커가 잠시 돌아왔다. 안귀령은 김어준의 테스트를 통과한 몇 안 되는 여성 중 하나일 뿐이다. 김어준은 몇 번 시도해 보고 안 먹힌다 싶은 기 센 여자들 앞에선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김어준의 가학성은 '예쁜데 맹한' 여자들 앞에서만 빛을 발한다.
나는 김어준이 매일 아침 전 국민을 앞에 두고 한 여성을 고문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렇게 자신이 앞에 앉힌 여성 앵커의 실력이 부족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충분히 실력이 검증된 다른 앵커를 쓰면 된다. ‘기상캐스터는 반드시 여성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편견이 여전히 단단히 박힌 한국 사회라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건 소위 ‘진보의 빅 스피커’라 불리는 김어준이 아닌가.
맥락이 제거된 이미지와 영상이 정보를 대체하는 시대에, 김어준은 ‘여성은 정치에 무지하고 미숙하다’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강화한다. 가랑비에 옷 젖듯 그 프로그램을 매일 지켜보다 보면 누군가는 분명 여성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생기기에 충분하다.
이것이 과연 2025년 대한민국의 ‘진보’의 모습인가. 매일 아침 스피커를 통해 여성의 목소리를 지우고 그들을 미숙한 존재로 규정하는 일상적 폭력은 한 여성의 실존적 고통이 ‘대의’ 앞에 묵살되는 거대한 폭력을 가능케 하는 자양분이 된다.
최근 '진보의 위선'은 강미정 전 조국혁신당 대변인에 대한 태도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그녀를 검찰의 거대한 성벽에 균열을 냈던 ‘처남댁’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이정섭 검사의 비리를 폭로하는 투사 이미지가 필요했던 김어준의 방송을 통해 세상에 처음 얼굴을 알렸다. 이 방송 이후로 강미정은 당시 이재명과 조국,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영입 제안을 받았으나 그녀가 비리를 폭로한 이정섭 검사가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을 수사했던 사람이기에 불필요한 오해로 이재명 대표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조국혁신당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밝힌 바 있다. 강단 있고, 현명한 사람이다.
강미정의 입당은 김어준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조국혁신당 대표였던 조국 역시 김어준 프로그램의 단골 출연자였다. 조국혁신당 창당 초기, 조국은 강미정의 영입을 직접 밝히며 자신이 삼고초려해 영입한 귀한 인재라고 언급했다. 강미정은 ‘검찰 독재 타파’를 외치던 조국혁신당에게 가장 강력한 이미지 중 하나였다.
조국이 수감된 후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되자 김어준은 지속적이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조국의 사면을 요구하고 압박하며 여론을 형성했다. 여기에 문재인 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조국의 사면을 이재명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선거에서 정청래와 박찬대, 두 경쟁 후보를 다루는 방식은 '언론'이라 부르기 낯뜨거울만큼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선동적이었다.
결국 대통령은 정치적 부담을 안고 조국을 사면했다. 갓 출소한 조국을 앉혀놓고 김어준은 '차기 대선'을 언급했다. 대통령 취임 100일이 채 안 되던 시점이었다. 모든 것이 '킹 메이커'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과 권력욕을 숨기지 않는 김어준이 원하는 그림대로 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결과는 편파적이지만 과정은 공정하다"라는 김어준의 궤변은 점점 더 궁색해졌다.
그리고 강미정이 조국혁신당 내 성범죄를 폭로했다. 그녀가 피해자로 목소리를 내고 참담한 2차 가해로 고통스러워할 때 김어준은 섬뜩한 침묵을 지켰다. 수개월 간 당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겠다며 인내했던 그녀가 결국 탈당까지 선언하며 끝없는 2차 가해의 고통을 재차 짚었을 때에도 출소한 조국과 김어준은 이상할 만큼 침묵을 지켰다.
강미정이라는 존재가 ‘검찰 독재 종식’이라는 대의에 복무할 때 김어준은 기꺼이 그녀의 스피커가 되어주었지만, 그녀의 고통이 자신의 진영과 그 대의에 방해가 되는 ‘불편한 진실’이 되자 철저히 외면했다. 검찰의 권력은 기소할 권리보다 기소하지 않을 권리로 더욱 막강해진다. 마찬가지로 김어준의 권력은 뉴스로 다룰 권리보다 다루지 않을 권리때문에 막강해진다.
강미정의 폭로가 조국혁신당의 성폭력 사건이 아니었자면, 김어준은 누구보다 앞장서 논평을 하고 피해자를 불러 인터뷰까지 했을 것이다. 그는 여태 그랬다. 그래서 그의 선택적 침묵은, 한 여성의 존엄보다 정치적으로, 사적으로 두루두루 가까운 정치인들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폭력적인 메시지였다. 그가 손가락질하는 반대 진영의 태도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침묵은 가장 비겁하고도 잔인한 형태의 메시지이다. 그것은 피해자들에게 “너의 고통보다 조직의 안위가 우선이다”라는 선언이며, “우리의 대의에 흠집을 내지 말라”는 암묵적 협박이다.
내가 살아오며 겪었던 수많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교실에서, 직장에서, 회식 자리에서 벌어지는 명백한 성희롱과 차별 앞에서 침묵으로 동조하던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얼굴. 그들의 침묵은 가해자에게는 암묵적인 지지와 연대의 손길이 되고, 피해자에게는 고립과 절망을 확인시키는 낙인이 된다.
조국혁신당이 내놓은 “절차에 따라 처리했다”는 해명은 공허하다. 그들이 말하는 ‘절차’란 결국 가해자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는 게 드러났다. 피해자의 회복과 보호가 최우선이 되어야 할 절차가, 가해자를 보호하고 사건을 축소하며 조직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절차가 아니라 폭력의 연장일 뿐이다. 조국혁신당에서 여성의 안전과 존엄은 언제나 다른 더 큰 권력과 명분 아래에서만 조건부로 허락되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분명히 하자면, 성폭력 가해자 김보협과 신우석은 자신이 조국혁신당 '조국'과의 친목질로 얻은 권력을 이용해 자기보다 약한 위치의 여성, 심지어 면접 보러 온 사회초년생에 위해를 가했다. 가해자들이 권력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피해자들이 여성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그래서 더 추잡하고, 비겁하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권, 특히 스스로 '진보'라 칭하는 수많은 유튜버 평론가들 또한 김보협, 신우석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성폭력 가해자들과 조국, 최강욱 등 2차 가해자들에 대해 선명하게 비판하는 이들이 없다. 구독자수가 떨어질까, 슈퍼챗이 줄어들까 눈치보며 전전긍긍한다. 국회에서 무려 12석이나 차지한 정당의 성범죄 폭로가 국회소통관에서 이뤄졌는데, 이에 대해 유감 표명이라도 한 동료 국회의원이 채 다섯 손가락에도 꼽히지 않는다.
조국 2년 형이 확정된 날, 노래방에서 성추행이 벌어졌다고 한다. 가해자와 이를 목격하고 침묵하거나 방조하거나 가담한 2차 가해자들이 노래방에서 불렀다는 노래는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80년대 대학을 나온 이모는 지금도 운동권 출신 민주당 국회의원 이름을 들으면 치를 떤다. 그들이 '민주화 운동'을 명분으로 당시 여성들에게 가한 성폭력을 정당화한 것, 그들이 그리 비판하던 기득권을 꼭 닮은 모습으로 정의로운 척 하는 모습이 기만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모는 한동훈을 지지한다.)
조국혁신당 성폭력 사태에 대해 비판하는 정의당은 자격이 없다. 그 당 역시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성폭력 사건과 미흡한 대처에 대한 폭로가 여전히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런 모순적인 '진보'의 행태가 결국, ‘젓가락’ 발언 이외에도 다양한 여성 혐오 발언을 숱하게 내뱉어 온 이준석 같은 인물은 물론 내란 세력들로부터 “진보의 가식과 위선”이라 비판받을 만한 충분한 빌미를 주었다.
국민의힘이 더하면 더했지,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닌데 억울하다고? 국민의힘과 공정하게 비교되지 않는 이유 자체가 조국혁신당 스스로 '진보'라 칭하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뻔뻔하게 악을 말하고 행하지만, 조국혁신당은 약자와 서민의 편에 서고, 정의와 혁신을 추구하며, 더불어민주당이 중도보수로 위치를 옮기면 그 왼쪽 자리를 채우겠다고 수도 없이 말해오지 않았는가? 그렇게 국민의힘과 공정하게 비교되고 싶다면, 스스로 도덕적 우월감을 내려놓고, '진보'의 이름표를 떼어내면 될 것이 아닌가.
조국혁신당 의원들과 고위당직자들 대부분이 검사, 판사, 경찰, 의사, 기업인, 그리고 문재인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 라인이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자들, 기득권을 비판하다 이제는 또 다른 기득권이 된 자들이 이너서클을 만들어 친목질로 패거리 정치하느라 당내 성폭력 범죄를 1년 가까이, 그것도 2차 가해가 넘쳐나도록 방조하고 외면했다. 이런 정당이, 어떻게 약자와의 동행을 말하고, 정의와 혁신을 주장할 수 있나. 어떻게 검찰을 개혁하고, 내란 세력과 싸우겠다는 건가. 도대체 어느 '진보'적인 사람이 이런 당을 지지하겠는가.
본질은 ‘우리 편’이라는 친목질 패거리 정치와 진영 논리의 폭력성이 자리하고 있다. 소위 자신을 ‘진보’라 칭하는 세력의 집단 문화와 정서 속에 오래도록 뿌리 박힌 ‘모순’이다. 이는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명백한 취약점이다.
조국혁신당은 검찰 독재에 저항하는 ‘정의로운 우리 편’이라는 강력한 서사 위에 서 있다. 그 서사 속에서 내부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목소리는 ‘적에게 빌미를 주는’ 배신 행위로 쉽게 왜곡되고 낙인찍힌다.
일부 지지자들은 강미정의 편에 서서 빠르고, 강력하고, 확실한 대처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내란 종식이란 중차대한 일 앞에서 갈라치기 하지 말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이것이 바로 최강욱의 논리이고, 이는 정확히 2차 가해이다.
당원이 수십만 명이라는 한 공당의 권력자가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저질렀다. 그리고 당은 이를 1년 가까이 쉬쉬하며 피해자를 징계하고 끊임없는 2차 가해로 괴롭혔다. “내란 종식’이 우선이니 나머지는 덮고 가자”고 말하는 이들은 ‘진보’가 아니다. 지금까지 그런 크고 작은 부조리를 서로 덮어주고, 친목질 하며 서로 눈 감아주며 왔기에 결국 윤석열에 정권을 내어주고, 내란까지 터진 것 아닌가?
성폭력 가해자와 그를 비호하는 세력에게 강미정이라는 존재는 ‘검찰 개혁’이라는 성스러운 임무 앞에 놓인 귀찮은 장애물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녀 역시 남편과의 이혼 소송, 이정섭 검사 비리 폭로로 인한 민사 소송을 하면서도, 아이 둘을 키우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내란 세력과 싸웠다. 이제 와서 그녀의 싸움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인가?
여성의 투쟁은 ‘거대한 대의’라는 명분 아래 너무나 쉽게 지워진다. “나는 진보”를 외치며 광장에 나가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가정과 직장에서는 권위주의적 가장과 폭력적인 가해자로 돌변하는 진보의, 아니 한국 사회의 위선, 그 자체이다. 그들은 서로의 치부를 감싸주고, 보호하며, 권력을 이어간다.
강미정은 당을 위해 자신의 피해는 어떻게든 묻고 가려 했지만, 자신 말고도 또 다른 피해자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리고 그 피해자가 자신보다 어린 사회초년생, 청년 여성이라는 걸 알았을 때 기자회견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했다. 그들이 절박하게 내민, 그러나 아무도 잡아주지 않은 손을 잡아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리고 조국혁신당의 이너서클, 그 견고한 ‘우리 편’의 논리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자신의 마지막 남은 ‘대변인’이라는 권력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대변인 자격으로 기자들을 국회로 불러 모아 기자회견을 했다. 목소리를 키웠다. 그녀는 "말할 수 있는 것 또한 권력"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사라지는 목소리가 많다는 걸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 여기서 누가 진정한 정치인인가?
그리고 그녀는 기자회견을 마친 다음 날 단독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가족, 내 안위만 생각하면 이런 폭로를 하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한 공당의 대변인으로서 그동안 국민을 향해 해 온 약속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기에 가능했다. 이 일을 계기로 앞으로 부당한 일을 당한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바란다. 여기엔 성별도, 나이도, 계층도 없다."
사회가 병들 때 가장 먼저 공격받는 것은 언제나 가장 취약한 존재들이다. 여성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는 결국 사회 전반을 물들인다. ‘여성’이 그 첫 번째 표적이 되고, 그다음은 순서를 따질 필요도 없이 노인, 장애인,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외국인, 빈곤층 등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이들이 있다.
왜 요즘 초등학생 유괴 시도 뉴스가 잦아지는데도 우리는 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이는 사회의 가장 연약한 고리부터 끊어지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의 이러한 선택적 정의와 위선은 결국 사회 전체의 도덕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가장 약한 자들부터 차례로 희생시키는 비정한 현실을 공고히 할 뿐이다.
이 혼탁한 진영 논리의 시대,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제 사리사욕을 채우는 이들이 범람하는 시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혼란스러워지는 시대, 나는 소설가 최인훈이 남긴 지식인의 자세를 다시금 곱씹는다.
“가장 진보적인 정파의 가장 진보적인 순간만을 가장 짧게만 지지하기.”
이 말은 맹목적인 ‘팬심’이 아닌, 오직 ‘가치’에 기반한 비판적 연대를 촉구하는 냉철한 지성인의 선언이다.
독립성과 비판적 거리 두기 (어떠한 현실정파에도 가입하지 않기): 특정 정파에 소속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논리에 갇혀 비판적 시각을 잃게 된다. 최인훈은 지식인이 특정 세력의 ‘부속품’이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순수한 순간에 대한 연대 (가장 진보적인 정파의 가장 진보적인 순간만을): 그는 현실 참여를 거부하지 않았다. 부패한 권력에 맞서는 혁명의 초기 국면처럼, 어떤 정치 세력이 가장 순수하고 진보적인 가치를 내걸고 행동하는 ‘특정한 순간’에 대한 선별적 지지를 말한다.
변질에 대한 경계 (가장 짧게만 지지하기): 이것이 핵심이다. 아무리 스스로 ‘진보’라 일컫는 정파라도 권력화되고 초심을 잃는 순간, 지식인은 즉시 그곳에서 빠져나와 다시 비판자의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지지는 영원한 충성이 아니라, 가치에 근거한 ‘순간적 연대’여야 한다.
김어준과 조국혁신당을 향한 맹목적 지지는 최인훈이 경계했던 바로 그 지점이다. 그들이 ‘내란 척결’에 맞서는 가장 진보적인 순간을 지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내부의 성폭력 피해자를 외면하며 권력을 향한 욕망의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가장 짧게 지지했던 마음을 거두고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광장에서 응원봉을 들어 되찾고자 했던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이었는가. 대한민국 사회가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외침이 아니었는가.
단순히 부패한 권력자를 몰아내고 ‘우리 편’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 전부였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광장에서뿐만 아니라, 가장 사적인 공간인 가정에서, 가장 일상적인 공간인 직장에서, 그리고 가장 치열한 공간인 정당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한 인간의 존엄성이 ‘대의’나 ‘조직’의 이름으로 유보되거나 훼손될 수 없다는 믿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가치이다.
강미정은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억울함을 넘어, 진보를 자처하는 세력의 도덕적 파산을 고발하며 2030 여성들이 들었던 광장의 응원봉 빛 아래 밀실의 그림자를 들춰냈다. 여성들이 ‘진보’에 묻고 있다. 당신들이 말하는 ‘혁신’과 ‘정의’의 세상에, 여성의 자리는 있기는 한 것이냐고.
우리는 그녀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녀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더 많은 등불이 그 곁을 밝히도록 연대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떤 거대한 명분도 한 사람의 존엄성 위에 군림할 수 없는, 그런 당연한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강미정에게, 그리고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이다.
진정한 진보는 적을 향한 날 선 구호가 아니라, 내 편의 잘못을 직시하는 고통스러운 성찰에서 시작된다. 가장 낮은 곳의 목소리에 가장 먼저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이 우리가 되찾아야 할 진정한 ‘진보’의 이름이다.